남명연원인물사전(1)

망 우 정

曺 益 煥
(本院 理事)

文筆로 世上에서 칭찬받은 “세익스피어”名聲을 떨쳤으나 교만을 떨지않고 餘生을 조용히 “뉴-프레스”에서 보내고 빛나는 一生을 마감했다. 그는 지금 “트리니티”敎會의 中央墓石 아래 잠자고 있다. 그 墓石에는 자기자신의 語句가 다음 같이 새겨져 있다.

지난 十二月은 郭忘憂堂의 달이었다. 선각자적 예지를 갖고 義兵을 일으키고 그 신출기묘한 用兵術을 구사한 반면 戰功의 문제는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後世에 많은 敎訓을 남기고 忘憂亭에서 餘生을 보낸 후 玄風에서 一生을 마감했다. 지금 그는 達城郡 求智面 台岩에서 잠자고 있다. 이 墓所는 遺言에 따라 봉분이 없고 平葬으로 되어있고 墓石도 손대지 않고 있다.

이 墓石과 墓碑에서 그 人品과 精神姿勢를 엿볼 수 있다. 그 偉大함이 永遠히 빛나리라, 나는 많은 感銘을 받았다.

여기서 忘憂堂이라는 인물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성장기에 있어서 性品의 특징적 면모와 수양과정 상에서 체득된 文武兼備의 자질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자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호매하고 기상이 엄중하여 눈을 뜨고 사람을 보면 광채가 번득여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선친인 定庵公이 龍淵巖가에 정자를 짓고 諸子로 하여금 정자에서 책을 읽히곤 하였다. 선생은 단정히 앉아 글을 읽으면서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위 두 인용문을 통해서 소시적 선생의 타고난 자질이 武骨風의 엄중 호방서러움과 함께 학자적 강명함을 동시에 아울러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조실록에 나타난 영의정 이덕형의 인물평을 보면 “사람됨이 질박하고 꾸밈이 없어서 마치 나무로 만든 紅梁과 같으며 經情이 곧으며 堅執이 흔들림 없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싫어하곤 했다”라 하여 천성이 화평스럽기 보다는 강의불굴하며 곧고 집념이 강한 면모가 있음을 지적해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사항을 종합해 보면 忘憂堂은 보다 무인풍에 가까운 인물이나 文人의 단정한 풍모도 함께 갖추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문무양면의 자질을 바탕으로 하여 선생의 수학과 단련과정 또한 두 영역을 아우르는 경지를 구축해 나갔다. 이상의 修業과정과 영역을 통해서 보면 그의 학문범위가 광대했을 뿐만 아니라 兵家의 이론과 실제를 겸하는 수업을 쌓음으로써 국가의 유사시에 기여할 수 있는 자체적 실력을 整備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학문의 지적 예지력과 함께 무의 勇적 실천력이 결합되어 특정사항이 주어지면 조화롭게 동시에 발휘될 소지가 있게 된다. 실제 忘憂堂은 이러한 문무겸비를 타고 났으며 후천적 수업 또한 병행함으로써 강의불굴의 向義的 기질이 임란이라는 특정 상황을 통하여 역사적 대의명분으로 승화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당대의 학파와 忘憂堂의 의병활동과의 관련성 문제이다. 이 문제는 지식인이라면 결코 당시대의 전통과 무관할 수 없다. 실제 조선조 만큼 사승관계나 학파가 중시되고 활성화된 경우도 드물 뿐 아니라, 忘憂堂 또한 16C 중반 南冥學派의 문인으로서 깊은 내면적 감화를 받았다. 居敬集義와 先行後文을 중핵으로 삼은 南冥학의 실천적 분위기를 거친 문인들 가운데서 많은 의병장들이 배출된 사실 또한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우선 南冥學의 본령이랄 수 있는 敬義사상은 “주역”의 文言에 그 연원이 있다. 남명은 이를 체득하여 일상의 지침으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차고 다니는 칼에 새기기를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敬이고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義이다”라 하여 필생의 학문적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敬義사상은 內向的으로는 정신적 엄숙함, 통일성, 경건함(敬)을 유지하게 하면서 동시에 外向的으로는 행위의 실천능력(義)을 고양시키는 체계로서 결과적으로 인식의 문제보다는 실천적 행위를 중시하는 특징을 지니기 마련이다.

이러한 학풍을 지닌 南冥문하에 “젊어서 南冥曺植을 따라 배웠고 南冥의 외손서가 된 것을 보면 이 학파의 실천적 학풍에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솔한 忘憂堂의 선진적 성품에 실천적 학풍이 접목된 결과 임란의 상황에서 의로서 적을 결단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쉽게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본격적인 의병활동에 나타나는 行義의 흔적은 의병활동의 지원을 위해 私財를 터는 상황에서 이해관계를 초월한 멸사봉공적 자세, 戰功을 둘러싼 논공행상의 대열에서 先義後功의 자세를 견지한데서 두드러진다. 우선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된 상황에서 갑자기 임란의 병화가 닥치자 方伯은 물론이고 백성들은 왜병을 보기만 해도 도망을 가는 사태가 연일 계속되자 선생은 “방백은 중책인데 오직 구차하게 살기만을 힘쓰고 나라의 存亡을 생각하지 않으니 초야에 있는 내가 죽는 것이 옳다고 여겨 家奴와 鄕兵을 불러모아 奮義討賊하였다. 최초의 倡義起兵이었다.

선생이 난초에 의병의 모집을 위한 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선생이 재산을 풀어 의병을 모집하자 부인이 만류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개죽음을 당할 작정을 하오?”하자 크게 노하여 칼을 뽑아 처를 베려하였다는 사실은 선생의 奮義救國의 결연한 의지를 극명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이상의 사실로 미뤄보면 起兵의 동기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내면적 의분의 표출이었음과 見危授命하는 勇斷있는 실천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利財觀念 보다는 大義名分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요소 또한 평소의 見利思義라는 차원 높은 도덕적 의식의 함양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전쟁의 와중에서 戰果에 따른 戰功 따위는 선생에게서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는 것이지 적의 머리를 바쳐 공을 요구하는 것은 義에 비추어 옳지 못하다”고 외쳤던 부분 역시 개인적 功利보다 우선시했던 尙義思想이 반영된 결과다.

임란이 종결된 후 초야에서 조정에 진출해 영욕의 길을 걷는 분도 있었으나 忘憂堂은 功名을 자처하지 않고 초연히 초야로 돌아가 평상인의 삶을 살므로써 진정한 集義의 공업을 완성하고 성대한 명성을 얻었다. 임란 후 심정을 토로한 詩를 소개한다.

비록 의병활동을 통하여 入世觀的 삶을 극대화 하였으나 出世觀的인 이상세계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陶淵明 處士의 삶의 양식이나 南冥處士의 탈세속적 삶의 모습이 그에게는 함께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忘憂堂의 여러 면모를 살펴 보았거니와 압축해 보면 對他的 行義를 통해 卽自的 成仁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진정한 자기완성에의 모색을 사회적 실천을 통해 접근한 것이다. 곧 국가라고 하는 구체적 공간과 임란이라는 시대적 변란의 두 계기를 빌어 희생적 대타적 실천을 통해 호국에 일조했고 그럼으로 역사 속에 진정한 자신을 實現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日本의 文獻에서는 바다의 이순신 육지의 과재우라 하여 대등하게 평가하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여운을 달이 하고 있으니 아쉬운 마음 금할 수 없다. 忘憂堂 憂患意識을 국가수호의 사명감으로 승화시킨 人物의 餘生을 보내신 亭舍를 잊을 수 있겠는가. 歷史를 바로 세워야 한다.

1995년 12월 文化體育部에서 이 달의 人物로 忘憂堂 郭再祐를 선정하여 記念行事를 서울(성균관), 부산(부산일보 강당), 대구(경북대학교), 진주(경상대학교)에서 개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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