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2
남명연원을 찾아서

 (2) 德溪 吳健

李 商 元
(本院 硏究委員)

선생의 諱는 健이요, 字는 子强이며 號는 德溪이다. 朝鮮 中宗 16年(1521) 4월 2일 산청의 德川에서 태어났다. 함양 오씨의 시조인 함양부원군 光輝의 12세손으로 산청으로 처음 옮겨간 덕강공 德季의 5세손이다. 교수공 軾이 祖父이며 참판공 世紀와 어머니 甑山훈도 都永康의 딸인 八 都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11세에 부친을 여의고 28세까지 다섯 번의 시묘살이를 해야 했다. 28세에 성주 이씨와 결혼하여 45세에 후사를 얻었으니 그가 長이다. 선생은 가세가 빈한하여 척지산의 정수암에서 독학하다가 31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한 뒤에 南冥 曺植 先生을 찾아 뵙고 수학하게 된다.

이 시조는 南冥의 首門인 오덕계의 山淸시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淸氣의 기상으로 山淸이 낳은 長松不屈의 큰 道學君子였다. 그는 명종 13년(1558), 38세 때 대과에 급제하고 39세부터 관직에 나아갔다. 첫 벼슬이 성균관 학유인데, 경북 성주에 가서 당시 목사인 錦溪 黃俊良과 같이 鹿峰精舍를 짓고 학생을 모아 가르쳤다. 이 때 姨姪인 寒岡 鄭逑를 불러 사서를 가르쳤다. 후일 吳健이 죽자 한강은 제문을 지어 자신을 小子라고 했을 만큼 그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南冥의 高弟인 東岡 김우옹도 그에게서 수학한 적이 있다. 54세를 살다간 생애 동안 덕계는 조광조 이후 知行一致를 바탕으로 도학을 정치에서 구현하려 한 도학정치가요 교육자였다.

덕계는 한편으로 실천궁행을 특성으로 하는 남명의 경의지학과 이론중심의 퇴계의 이기론을 융합하고자 하였다. 그는 執德不撓의 실천적 학문정신을 표방하면서 『中庸』과 『大學』의 가치를 재정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修己治人에 진력하였고 정주학 일변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즉 덕계의 학문은 유가의 실천적 윤리서인 『중용』과 『대학』의 가치를 재정립하여 이를 교육하였고, 당시의 학계를 풍미하였던 정주학을 하기 전에 修己治人의 학문인 『대학』·『중용』의 깊은 뜻을 체득함으로써 그는 정주학 일변도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폭 넓은 학문의 바다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는 退溪와 延平問答質疑를 벌인 大學者였으며, 『中庸』을 통하여 일생을 이의 실천에 힘써며 庸學에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덕계가 퇴계 앞에서 『중용』과 『대학』을 강론하자 퇴계가 감탄하여 “이런 것은 모두 내가 사색하지 못한 것인데 그대의 강론을 들으니 지극히 옳고 지극히 좋다. 다른 글은 내가 그대보다 조금 나을지 모르나 『중용』·『대학』만큼은 그대에게 미치지 못함을 알겠다”고 하면서 그의 庸學을 칭찬하였다.

오건의 淸名과 학문은 당시 조야에 널리 알려져서 성균관 대사성이던 許曄은 그를 성균관 제일의 학자라고 말했다. 그가 이조전랑직을 5차례나 맡았음을 볼 때, 그가 얼마나 조정과 사림의 중망을 받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가 중앙정계에 들어선지 수 년 동안 모두 6회의 疏 와 51회의 狀啓를 올려 당시의 權奸을 규탄하고 폐정개혁에 앞장섰다. 그가 50세 때 어사 겸 경차관으로 호남을 순시하며 부패한 관리를 바로 잡고 농민침탈을 근절하여 군역의 적폐를 시정한 것은 당시로서 드물게 보는 쾌거였다. 이에 대하여 南冥은 편지를 보내어 “나라의 큰 일은 兵事와 양곡인데 이제 막혔던 적폐를 없애게 됐으니 子强같은 이는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를 칭송했다.

덕계 오건 선생의 학문은 그가 이룩한 庸學을 기반으로 스승인 南冥의 思想的 기저인 敬과 義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그는 남명의 敬義圖에 깊은 영향을 받아 窮理居敬을 특히 강조하였다. 궁리거경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실천적인 면모는 그가 선조에게 올린 궁리거경차( )와 宋理宗崇尙學理論이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그는 퇴계와 李楨의 사제문을 맡아 지을 만큼 당대의 명문장가였다. 한편, 그는 역사에 대해서도 남다른 眼目을 보였다. 즉 그는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修史의 도리를 밝힌 「강목불계춘추론」이란 글을 지었다. 그는 이 외에도 『丁卯日記』를 비롯한 두 권의 日記를 저술해 현실비판의 예리한 史眼을 보이고 있다.

그는 51세 때 도학정치를 중앙정치 무대에서 펴려던 뜻을 그만두고 마침내 귀향하게 된다. 이때 서애 유성룡과 율곡 이이도 선생의 귀향을 서러워하였다. 그가 귀향한 뒤 한 해 동안 10여 차례나 소명과 관직제수가 있었으나 번번히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국은에 보답코자 서울로 가는 도중에 발병하여 되돌아 오고 말았다.

귀향한지 3년째인 1574년에 병으로 사림과 향인들의 통곡 속에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덕을 숭모하기 위하여 수제자인 한강 정구는 서계에 士林과 더불어 서원을 세워 선조 39년(1606)부터 향사를 지냈으며 광해군 9년(1617)에는 西溪書院으로 사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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