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南冥學派의 歷史的 位相定立을 위한 斷想
-南冥學派와 朋黨論-

薛 錫 圭
(문학박사, 경북대 강사)

주지하는 바와 같이 南冥 曺植을 宗匠으로 삼아 그의 학문과 철학을 계승한 남명학파는 宣祖·光海朝에 걸쳐 독자적 학풍을 형성하며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남명학파는 광해조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자체 분열의 기미를 보인데다 廢母殺弟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仁祖反正 이후 철저한 정치적 보복의 대상이 됨으로써 학파로서의 위상이 급속하게 저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반정의 명분을 확보함과 동시에 견제세력에 의한 부담을 해소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 元勳(功臣)정권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산물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남명의 학문과 철학을 제외한 학파의 정치적 입장이나 정치활동에 대한 적극적 평가는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까지도 사실상 금기의 대상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연구자들의 연구의지의 결여나 객관적 사료의 결핍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남명학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단순한 善惡의 논리와 결과론적 시각으로만 파악하려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면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제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갖는 것이다. 특히 정치세력의 역학관계에 대한 정치사적 접근의 경우 다양한 자료에 대한 면밀하고도 객관적인 검토의 토대위에 주관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역사란 복잡다기한 것이기 때문에 선악의 단순논리에만 의존하여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일차적으로 결과에 의해 영향받는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보편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 사실의 발생배경이나 전개과정에 대한 복합적이고도 총체적인 분석의 토대가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남명학파는 특히 광해군대 다양한 정치세력간의 역학구조에서 정치적 우위를 유지하며 정국을 주도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인조반정으로 실각한 이후 일반적인 정권의 부침과는 달리 철저하게 정치에서 배제되는 행보를 걸어야 했다. 이는 退溪學派가 서인세력에 의해 정치에서 소외된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이 같이 그들이 정치에서 배제된 이유는 天倫에 위배된 행위와 관련되었다는 도덕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광해군대 남명학파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쟁점은 여기에 촛점이 맞추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폐모살제 사실여부 만이 논란의 대상이 될 뿐 근본적인 배경에 대한 검증은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더구나 폐모와 같은 것은 당시 貶損節目이 마련되기는 했으나 광해군의 반대로 실질적인 廢黜이 단행된 바도 없었고 중국에 보고된 적도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왜 대북세력의 주도에 의해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고 폐모주장이 대두했는가 하는 것이지 실행여부는 아닌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인목대비와 광해군 및 대북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이 고려되어야 하겠으나, 이이첨과 허균이 전면에 나서 폐모공론을 획책한 정치적 배경과 논리에 대한 엄정한 검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당시 서인세력도 폐모의 공론화는 이이첨이 討逆峻論을 자처하며 정국주도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에 의한 것으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음은 인정하고 있었다.

사실 남명학파가 폐모살제에 연루된 혐의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칠 정도의 是非·正邪와 君子·小人의 분변에 집착하는 그들의 기질상의 특성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지리적 환경이나 역사적 환경의 산물이 아닌 한 유전적·생물학적 성격의 기질로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남명학파의 정치이념과 현실인식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조식으로부터 칼(義)과 방울(敬)을 각각 전수받은 정인홍과 김우옹을 중심으로 한 학파의 사상적 기반 및 정치적 입장과 함께 당시의 제반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해야만 남명학파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균형있는 평가도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선조조 이후 대두하는 붕당정치는 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사림세력이 歐陽修·朱子의 朋黨論, 곧 성리학적 붕당론에 근거하여 분열함으로써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붕당정치는 사림의 公論을 토대로 정국을 운영하는 사림정치의 본원으로 정치참여층의 확대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붕당간의 상호공존과 견제를 근간으로 한 정연한 논리를 토대로 하여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붕당긍정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구양수는 그의 「朋黨論」에서 “군자가 군자와 더불어 道를 같이함으로써 朋을 삼고 소인이 소인끼리 利를 같이하여 朋을 이루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나 朋은 소인에게는 없고 군자에게만 있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군자들의 집단을 붕당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붕당의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자·소인의 엄정한 구분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붕당간의 견제구조를 상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자도 「與留丞相書」에서 “붕당은 朝臣간의 相爭에 그칠 뿐이지만 그것을 없애버린다면 나라마저 망하게 된다”면서 朋黨亡國論을 거부하는 한편 군주도 붕당에 참여토록 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견해를 제시한 바가 있다. 나아가 그는 붕당간의 조정을 배격하면서 붕당 내에 賢否忠邪를 변별하여 소인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그와 같은 군자·소인의 분변을 전제로 하는 歐·朱의 붕당관은 勳舊 및 戚臣勢力을 소인으로 규정하는 사림세력에게 여과없이 수용되었다. 그들은 조선전기 정치적 파행과 경제적 파탄의 원인이 훈척세력이 왕조의 이념인 성리학에 기반한 정치·사회개혁을 도외시한 채 독점적 권력장악을 추구한 때문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소인배의 전횡을 막고 진정한 개혁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군자들이 결집하여 붕당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 같은 군자·소인론은 훈척세력에 비해 상대적 열세에 있었던 그들이 시련을 당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며, 四大 士禍의 정치적 파란은 그러한 배경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특히 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己卯士林이 道學政治를 표방하며 추진한 정치개혁이 실패하게 된 것도 훈척을 소인으로 몰아 배척하는 그들의 익분법적 정치논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훈척세력은 붕당 자체에 대해 극단적인 금기의 입장을 갖는 漢唐 儒學에 근거하여 사림세력에게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그들 스스로 성리학적 정치논리를 포기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明宗朝 그들 정권이 사림세력의 지속적인 저항을 받으며 사상논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표면상 文定大妃의 崇佛政策이 원인이라 할 지라도 궁극에는 그들의 이념적 취약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문정대비의 사망에 이은 尹元衡의 실각과 훈척정권의 와해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림세력은 3년 뒤 명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沈通遠 등의 척신들을 배제한 가운데 측근이 없는 宣祖를 전격적으로 옹립함으로서 士林政治를 확립하기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정국을 주도하게 된 사림세력에게 주어진 일차적 과제는 조정에 남아있는 勳戚政治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년사림과 장년사림이 그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방법에 있어 강·온으로 입장이 나누어짐에 따라 사림세력은 東人과 西人으로 분열하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청년사림은 훈척의 척결에 있어 군자·소인의 엄격한 적용을 주장한데 반해 仁顯大妃 沈氏의 동생인 沈義謙이 포함된 장년사림은 그것을 정치보복성 조치로 간주해 반대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동인 사이에서는 서인을 사림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훈척과 같은 부류의 소인으로 몰아 朋黨으로 간주하지 않으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李珥가 사림의 분열을 막고 保合을 추진하며 동·서인의 調劑를 촉구하고 나서자 특히 남명학파에서 불만을 표시하고 나섰다. 金宇 은 보합에 앞서 是非明辨이 전제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였고, 정인홍도 그의 성품을 지나치게 유약한 것으로 평가하여 미온적인 훈척 잔재의 척결에 비판적인 태도를 분명하게 했던 것이다.

남명학파는 이와 같이 훈척정치의 완전한 청산을 통한 명실상부한 사림정치의 확립을 추구하는 동인 가운데서도 강경한 입장에 서 있었다. 그것은 조식이 누차 명종에게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할 것을 촉구하고, 勳戚을 배후에서 조종하던 문정대비를 궁중의 과부에 불과한 존재로 질타한 것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그같은 태도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전개하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며, 倭와의 타협을 통해 전쟁종식 방안을 모색하던 柳成龍을 主和 國의 책임을 물어 공격하는 근거가 되어 남·북인이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남명학파의 준절한 군자·소인의 분변은 결과적으로 훈척정치 잔재의 청산에 의한 진정한 사림정치의 확립, 조직적 의병활동에 의한 성공적인 국난극복을 거치면서 그 효용성이 입증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리학이라는 공통된 이념을 근간으로 한 學緣을 매개로 결집된 사림세력의 역학구조에서는 학파의 배타적 우위확보와 함께 정치권력의 독점적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宗匠의 문묘종사를 통한 정통을 자부할 수 있는 집권명분의 확보, 군권과의 긴밀한 밀착, 사림공론의 확보를 위한 지지기반의 확대 등이 우선 필요한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기묘사림이 추진한 개혁이 실패하게 된 교훈에서도 충분하게 찾아지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정인홍에 의해 야기된 晦退辨斥사건은 사림세력의 從祀運動과정에 조식이 제외됨으로써 집권에 상응하는 명분을 보장받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한 대북세력의 과잉반응에서 파생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그들이 광해군을 지지하여 밀착하게 된 것도 왕권을 배경으로 한 집권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 정권이 왕권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한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도 용인할 수 없는 것으로 광해조 정치가 討逆政局으로 운영된 배경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인홍이 반정세력에 의해 처형당하기 전 스승에게서 배운 것은 君臣父子의 大義 뿐이라 술회한 것은 자신이 폐모살제와 무관함을 강변한 것이자 그의 정치론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 그는 殺弟에 반대하면서도 영창대군을 앞세워 반란을 도모하려는 무리는 討逆論에 근거하여 철저하게 처벌해야 할 것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나아가 李爾瞻과 許筠이 언관 및 유생을 비롯한 中人·庶人까지 앞세워 폐모가 公論이자 國論임을 표방함으로써 유례없는 公論政治의 활성화를 초래하게 된 것도, 파탄성이 부각된다 할 지라도 공론에 토대를 둔 정국운영 방식을 거부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결국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는 광해군대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배타적인 군자·소인론을 적용하였던 것이며, 그 논리적 근거는 是非正邪의 분변을 전제로 하는 歐·朱의 朋黨論에 있었다. 따라서 광해군대 제반 정치적 현상은 구·주 붕당론, 곧 성리학적 붕당론의 극단적인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으로 대북세력의 독점적 권력욕이라는 단선적 시각 내지는 붕당정치의 미숙한 운영의 소산이라는 견지에서 이해되기는 어려운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훈척과 사림의 융화될 수 없는 정치세력간의 대결에서 사림정치의 실현이라는 목표의 달성에는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사림정치가 확립된 상황에서 사림 일반의 공감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집권하고 있는 상황에서 文景虎 등 일련의 남명학파가 中北으로 좌정하는 등 학파 내부의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도 구·주 붕당론 적용이 시대적 한계에 봉착했다는 판단에 따라 새로운 독자적 정치운영 방향을 모색하려는 시도에 따른 것이라고 하겠다. 나아가 인조반정을 계기로 군주와 훈신의 강력한 규제 속에서 서·남인의 공존과 견제구조가 일정하게 확립되는 것은 대북정권의 그와 같은 정국운영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요컨대 대북세력이 주도하던 17세기 전반의 정국은 남명의 학문과 철학을 계승한 남명학과의 현실인식과 정치운영론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다. 조선시대 정치가 붕당의 역학관계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이 학연을 매개로 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 시기 정치의 역사적 功過는 남명학파의 역사적 功過와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남명학파 전체의 정치논리 및 성향에 대한 구조적이고도 심층적인 검토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단순한 선악의 논리를 앞세우거나 철학과 정치를 별개의 것인양 분리하여 파악하려는 자세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 평가는 목적이 배제된 진실에 근거해야만 공정해 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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