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논단

南冥의 敎育에 있어서 自然主義的 傾向
-「한훤당화병발(寒暄堂畵屛跋)」을 중심으로-

史 載 明
(경상대 강사)

남명의 교육사상이란 남명의 교육활동을 통해서 나타난 思想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는 교육에 관한 남명 자신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자는 전자의 입장을 따르기로 한다. 왜냐하면 남명이 교육에 관해 학설을 체계적으로 세워 논한 것은 그리 흔하지 않지만, 그의 교육활동을 통해서 나타난 사실들을 상정해 볼 때, 남명이 후학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점은 그의 교육적 활동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남명이 교육에 대해 가졌던 기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은 대화 한 대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라고 하는 글을 통해서 볼 때, 그는 賢才를 선발하여 각기 그 재능에 따라 성취시켜 주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교육관이라고 볼 수 있다. 남명의 교육사상에는 당시 儒家뿐만 아니라 道家, 佛家, 심지어는 陽明學的인 요소도 산견되는데, 여기서는 남명의 교육에 있어서 자연주의적인 경향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남명은 자신의 교육에 대한 상세한 주장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교육사상에 대한 충분하고도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시대적 사회상황 속에서 남명의 교육사상을 주로 당시의 학문적 경향 일변도로만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남긴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반박의 여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남명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했으며, 그의 문집에는 여러 군데 노자·장자적 언어문자가 산견된다. 이것은 남명의 학문적 경향에 대하여 한 가지만을 주로 할 것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흥미영역의 확대를 주장하고 있는데, 남명은

라고 하는 『莊子』「逍遙遊」篇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학문에 있어서 두루 이해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측면들을 근거로 해서 노장적 사유의 흔적을 완벽하게 되살려 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남아 있는 단편을 결합하고 재구조화 시킬 수 있다면 남명의 교육에 있어서 자연주의적 경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아울러 남명의 노장이해가 심층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儒家는 하나의 궁극처를 확보하여 가는데까지의 과정을 용인하고, 그 과정 속에서의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인정하는 데 반해서, 道家는 그러한 과정을 부정하고 모든 인간적인 노력이 인위적인 일체의 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만 행해져야 한다고 보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유가와 도가는 서로 같은 점도 얼마쯤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송대의 성리학자들도 아예 부정하지는 않는다. 남명의 교육사상에 있어서 자연주의적 경향은 조선 중기 인위적 지식과 암송 위주의 교육적 상황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남명이 남긴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그의 교육사상은 유가·도가·양명학적인 측면으로 다양하게 고찰할 수 있다.

남명의 교육사상을 연구함에 있어서 자연주의적인 경향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한훤당화병발」은 그의 교육사상을 자연주의적 경향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남명의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동양과 서양의 교육사상에 있어서 자연을 개략해 보고, 남명의 교육에 있어서 자연주의적 경향과 관련된 자료들 중 특히 「한훤당화병발」을 검토해 봄으로써 남명의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이해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원래 儒家思想과 道家思想은 상호 배타적인 체계는 아니었다. 유가와 도가는 상호 보완관계, 표리관계를 이루며 중국사상의 두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 것이다. 그 두 흐름은 고대에 있어서는 서로 접촉된다. 이를테면 孔子에게서도 그러하다. 공자는 실천가이며, 개혁가이고, 현실주의자이며, 또한 이상주의자이다. 그리고 공자는 누구보다도 강한 지식욕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역사상 중요한 사람들의 생각을 이어 받고자 하고, 현존하는 당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두루 찾아 다니며 배웠다. 그 중에는 노담(老聃)도 있다. 이 노담이라는 인물은 사마천의 『史記』에 『老子道德經』의 주인공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도가사상은 구체적으로는 이 사람에게서 기원한다고 말하여진다. 공자는 이 사람에게 禮에 대한 가르침을 청한다(『史記』 「老子韓非列傳」 第三). 그리고 『孔子家語』에 보면 周에 가서 이 노담을 만나고 온 다음에 공자의 道가 많이 깊어졌다고 말하여지기도 한다(『孔子家語』 卷第三, 觀周第十一).

유가와 도가는 支末에서는 분명히 갈라지지만 근원에서는 상호 합치되는 측면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들은 동일하게 ‘無爲'를 말한다. 행위에 있어서도, 교육에 있어서도, 그 궁극의 자리에서는 유가나 도가나 다 무위의 이념을 표방하는 것이다.

‘無爲'는 도가사상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대로 유가사상 속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論語』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공자왈. 저절로 다스리신 자는 舜임금 이실 것이다. 무엇을 하셨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南面을 하였을 뿐이다(『論語』「衛靈公」篇 第十五,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라고 하면서 堯·舜 이 儒學에서 가장 이상적인 성현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이고 보면 공자의 이 말은 유학의 이상적 정치이념이‘無爲而治'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유학 속에서의‘無爲'는 『孟子』에서 보다 많이 나타난다. “중니는 너무 심한 일을 하지 아니하였다.(『孟子』「離婁章句下」篇, 孟子曰 仲尼不爲已甚者)”라고 하면서, 맹자가‘無爲' 또는 ‘不爲'의 상태를 확보하는 것이 인간의 이상적 경지라고 이해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또한 맹자는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이 있은 뒤에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孟子』「離婁章句下」篇, 孟子曰 人有不爲也而後 可以有爲)”라고 하면서 ‘無爲' 또는 ‘不爲'의 상태가 모든 인간적 행위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 부분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도가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른바 노자의‘無爲而無不爲'와 문자의 차이는 있지만 의미상 완전히 일치하는 글귀라고 볼 수 있겠다.

중국의 교육사상에 있어서 자연은 중요한 개념의 하나로 作爲함이 없는 道의 작용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자연'이란 본래 ‘저절로 그러하다'는 의미였지만 도의 작용이 내재적 자기 원인으로 말미암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 자체를 지칭하기도 하고, 또한 자연현상 및 자연물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老子와 莊子을 들 수 있다.

老子가 말하는 자연은 곧 道이다. 도는 그것에 대립되는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도는 단지 초월성이나 포괄성만을 그 본질적 특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산출하며 산출되어진 만물은 또한 도의 본성을 分有한다. 따라서 天·地·人 및 만물이 도의 본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德이며, 이를 도의 측면에서 보면 만물에 내재하는 것이 된다. 도는 만물에 내재하지만 만물의 형태에 구속되지 않는다. 이처럼 도는 포괄성과 초월성 및 내재성을 공유하고 있다. 단지 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과 만물도 이러한 도의 본성을 갖추고 있다.

莊子의 경우에 있어서 자연은 다음의 글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河伯이 물었다.‘무엇을 자연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라 합니까?' 北海若이 말했다. ‘소나 말이 발이 네 개인 것을 자연이라 하고, 말머리에 굴레를 씌우고 쇠코를 뚫는 것을 인위라 한다. 그러므로 인위로써 자연을 망치지 말고, 造作으로써 본래 모습을 훼손치 말고, 탐욕으로써 名利에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삼가 지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그 참에 돌아감'이라고 하는 것이다. (『莊子』「秋水」篇)” 결국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서양의 교육사상에 있어서 자연은 그 명칭에서 보여주듯이 자연이 실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자연 그 자체가 인간 존재와 인간성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설명해 주는 전체적 체제이다. 고대에서 자연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많이 나타나 있지만 이를 체계화시킨 대표적 인물은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낭만적인 특징을 지녔다고 하는 J. J.Rousseau(1712-1778)를 들 수 있다.

J.J.Rousseau의 경우에 있어서 ‘자연'은 기존의 질서를 빼어버린 데서 성립하는 無時的인 상징적 구성물이다. 그 ‘자연'은 세 가지의 의미를 갖고 적극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첫째로 ‘자연'은 ‘인위'에 의해 타락되지 않는 ‘좋은 것'이란 가치의 상징을 가지며, 둘째로 ‘인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필연이며, 셋째로 내부발전적인 것으로서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루소의 저서 속에 다양한 문맥으로 나타나지만, 교육론에서는 특히 현저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린이는 교사의 제자가 아니라 자연의 제자이다”,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자연이 지시해 주는 길을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자연의 발육에 따라 교육하라” 등과 같은 문장 가운데 나타나 있는 ‘자연'은 모두 세 가지의 의미에 수렴되어 있다.

이렇듯 교육에 있어서 자연주의적 경향을 지닌 인간관은 동양의 철학과 사상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周易』의 「繫辭傳」에서는 “한 번 陰하고 한 번 陽한 것을 道라고 한다. 이것을 따르는 것이 善이요, 이것을 이루는 것이 性이다”라고 했고, 莊子는 “천하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당연한 모습이 있다고 했다(天下有常然)”. 그 당연을 당연인 채로 두는 것이 인간 본래의 삶을 온전히 하는 기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사상에도 이러한 자연주의적 인간관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속담에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라든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등과 같은 의미는 민중의 의식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인간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인간관에서 나온 조화있는 인간성장을 도모하려는 교육의 입장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아동존중사상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대의 인간주의를 재생시켜 인간·자연·현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키워주었고, 학교교육에 자연과학적 실용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자연주의 교육사상으로 대변되는 노자는 정치면에 있어서 이미 ‘無爲而治'를 주장하였다. 智慧·仁義·巧利 등 기타의 사회의식 형태를 모두 禁絶하였다. 과연 이렇다면 그것은 곧 無敎育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無敎育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방임의 교육이 아니라 作爲나 人爲가 개입되지 않은 의미에서의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말없는 가르침'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이런 까닭에 성인은 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침을 행한다(『道德經』 第2章,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고 하였다. 여기서 ‘不言之敎'란 바로 자연교육을 뜻하는 것이다. 자연교육의 추세에 따라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敎化케 하고 저절로 正하게 하며 저절로 부유하고 순박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자연교육의 공효가 극에 도달한 때이다. 동시에 老子의 “순박함을 보여주어서 거기에 쫓게 하면 私心과 欲望이 적게 되고(『道德經』第19章, 見素抱撲 少私寡欲), 학문을 없애버리면 근심이 없어질 것이다(『道德經』 第20章, 絶學無憂)”라고 하는 교육목적도 역시 도달될 수 있다.

노자는 자연교육이 영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으면 이는 곧 지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氣를 專一하게 하고 柔和함을 이뤄서 능히 젖먹이 ( 兒)처럼 순수하게 된다(『道德經』 第10章 專氣致柔, 能 兒互)”“영구불변하는 無爲의 德에서 떨어지지 않고 영아같이 순진 소박한 상태로 복귀할 수가 있다.(『道德經』 第28章, 常德不離 復歸於 兒)”고 했다. 왜냐하면 영아는 지식을 갖지 않은 가장 천진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상태가 자연주의의 정의를 대표할 수 있다. 『道德經』에서는 영아의 상태로 돌아가 회복한 상태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 고 있다. 예컨데 “세속의 衆人들은 마치 풍성한 잔치상을 받은 듯 또는 봄에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전망하듯 즐거운 양 들떠 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은 담담하고 염정하여 아무런 징조도 없으며 마치 웃음조차 모르는 어린 젖먹이와 같다. 맥없이 풀죽은 모습은 마치 돌아갈 곳도 없는 듯하다. 衆人들은 모두 넉넉하고 남음이 있으나 나 혼자만은 궁핍한 듯하다. 나의 마음은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인가. 아무런 변별도 분석도 하는 바 없이 혼돈하기만 하다. 속인들은 모두 명석하게 분석하지만 오직 나는 혼돈 속에 얼버무린다. 나는 바다같이 깊고 조용하고 끝없이 표일하게 바람을 타고 난다. 중인들은 모두 유능하지만 오직 나만 우둔하고 촌스럽기만 하네 나만 홀로 남들과 달리 만물을 키우는 젖엄마인 大道를 높인다(『道德經』 第20章)”고 하였다. 노자는 어린아이의 天賦的인 상태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이는 루소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듯 동양 교육사상에 있어서의 노장적 자연주의 경향과 서양 고육사상에 있어서의 루소적 자연주의 경향은 조선 중기 남명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남명의 교육에 있어서 자연주의적 경향은 후에 인간 본성의 회복을 위한 교육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남겨줄 것이다.

남명이 남긴 글은 『文集』과 『學記類編』, 그리고 기타 관련 자료들에 의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남명의 詩文과 『學記類編』에는 유가적인 요소 이외에 노장학·양명학·불교 등과 같은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남명의 자연주의 교육사상과 관련하여 노장사상적 요소가 가미되었다고 볼 수 있는 『문집』의 詩들이 있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명의 교육에 있어서 자연주의적 경향의 한 측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가 「한훤당화병발」이라고 하는 약간 장편의 문장이다. 이는 갑자사화로 인해 비명에 죽은 寒暄堂 金宏弼이 그린 古畵가 일단 김씨 일가에서 散失된 후 약 백년 후에 기적적으로 자손의 손에 돌아 온 경위를 기술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그 문장이 시작되고 있다.

남명은 김초계의 청으로 갑자사화의 여파로 유실된 김굉필의 병풍이 백년 후 우연히 그 자손의 수중에 다시 들어오게 된 경위를 「한훤당화병발」의 내용으로 기술하였다. 남명은 이러한 우연을 人爲가 아닌 自然의 이치로 돌리고 ‘無藏也故有藏 無意也故善藏'이라고 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소유하기 보다는 자연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병풍을 제대로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표현 중의‘太虛', ‘物化',‘無藏' 등의 용어는 노장문자이지만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분적인 노장문자의 사용보다는 문장전체의 내용이 노장사상의 핵심인 無爲自然의 색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남명은 人과 物의 관계에서 물질을 오랫동안 所藏하는 방법에 대하여 物(質)의 保有는 인간의 능력 밖의 것이기 때문에 後生大事에 소장하는 것 보다는 天(自然)에 맡기는 편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文末에 도난을 당하지 않으려고 金緘을 해서 소중하게 지키더라도 ‘壑藏之舟’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물론 『莊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여기에서 남명이 인위를 배격하고 무위자연을 선호하는 경향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골짜기 속에 배를 숨겨두는 꼴이라고 하는 말은 아무리 견고하게 갈무리해 두더라도 때로는 조화(造化)에 의하여 잃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莊子』에 나오는 無藏이라는 말은 장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용어이다. 남명은 비유에 능란하였음은 다음의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남명은 앞의 「한훤당화병발」에서 “잘 감추는 사람은 하늘에 감춘다. 太虛는 하늘의 寬이다. 虛에 用을 놓음으로써 그 숨김이 곧 無藏이다. … 物을 物에 붙여 자연에 맡긴 연후에 하늘에 따를 뿐이다. …物의 自然에 맡긴 것은 虛해 사물을 그대로 받아들여 無藏인 까닭에 善藏이고 숨기려는 뜻이 전혀 없기에 잘 숨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용사하고 있다. 또한 천하를 천하에 감추면 잃어버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이것이 바로 無藏이고 善藏인 것이다. 남명이 혁대의 명에 새긴 ‘藏漠沖'도 다름 아니라 무장을 뜻한다. 그는 無藏이란 말을 자신의 혁대에 써서 날마다 차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명은 『莊子』「大宗師」篇에,

라고 한 글에서 시사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남명이 무위자연적 경향을 지향한 사실은 남명의 교육사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도 교육이념적 요소로도 작용한다. 즉 무위자연을 바탕으로 한 ‘道에의 復歸'를 교육이념적 요소로 상정함으로써 作爲的이며 인위적인 현실에서 인간성 회복을 위한 교육을 교육의 목적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명에게 있어서 자연주의적 경향을 띤 인간성 회복을 위한 교육은 오늘날 교육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리라 여겨진다.

문명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발달이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파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되어 가면 갈수록 자연은 그 만큼 상처를 입는다. 여기서 남명의 노장적 성격을 띤 자연주의적 경향에 있어서의 자연존중, 자연 회귀 사상이야말로 오늘의 우리가 환경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처방이라고 여겨진다.

인간이 타고난 가능성을 모두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이 선한 인간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하는 생각은 곧 교육이 인간성의 조화로운 성장을 도모하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교육이란 마치 참나무로 자랄 소질을 지니고 있는 도토리로 하여금 자연의 질서에 따라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그 도토리의 타고난 가능성, 커다란 참나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하도록 돕는 일, 즉 영양분과 광선을 충분히 받아 들일 수 있도록 돕고, 짐승이나 벌레가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미처 다 자라기 전에 부러지거나 짓밟히거나, 인위적으로 형태를 변형시키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각자가 자연으로부터 그 나름의 소질과 가능성을 타고 난다. 인간이 타고난 자연적 성장가능성을 완전히 성장하게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교육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타고난 소질과 가능성을 모두 실현할 수만 있다면 인류사회는 조화로운 이상사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래 자연의 질서란 조화로운 것이다.

이제 21세기를 앞두고 인간과 자연이 공멸하지 않고 공생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죽어가는 자연을 치유하여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적대와 대립이 아닌 화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이 절실히 요청되는 이러한 때에 인간과 자연의 일체화 내지 조화를 강조하는 동양사상적 자연관, 특히 자연을 최고의 가치로 예찬하여 인간에게 일체의 인위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하는 노장사상적 자연관을 수용함으로써 나타난 남명의 교육사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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