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1-남명학파 고문헌 소개(1)

『南冥集』에 대하여

金  敬  洙
(本院 事務局長)

남명선생이 남긴 글은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남명선생이 직접 쓴 詩文類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이 평소 독서하면서 성현의 글 가운데서 학문에 긴요하다고 여긴 것들을 메모해 둔 것이다. 선생이 직접 쓴 詩文은 後人들의 글과 國王의 賜祭文 등을 묶어서 『남명집』으로 간행되었으며, 독서 중의 메모는 다시 『學記類編』이란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그런데 선생의 문집을 보면 江右學派의 宗師로 추앙받는 그 명성에 비해 남아 있는 글의 양은 무척 적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선생이 嶺南士林派의 학풍을 계승하여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여 저술을 별로 남기지 않았고, 특히나 "程子와 朱子 이후로는 저술할 필요가 없다(程朱以後 不必著書)"는 즉 유학의 모든 이론적 체계는 주자에 이르러 다 갖추어 졌으니 남은 것은 이의 실천여부에 달려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아 있는 글 마저도 임진왜란에 덕천서원과 산천재가 불에 타버릴 때 같이 소실되어, 문집에 실린 글은 거의가 후인들에게서 수습하였기에 완전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학기유편』은 來庵 鄭仁弘이 선생의 임종 직전에 『近思錄』의 체제에 따라 다시 편집할 것을 허락받아 이 수필 원고를 합천의 내암 집으로 가져갔으므로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참 후인 丁巳年(1617)에 이를 내암의 주도하에 창주 하징 등이 『근사록』의 체제에 따라 편집·간행하였다. 그러므로 이 『학기유편』은 남명학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며, 특히나 선생이 그린 「學記圖」는 더욱 그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다.

『남명집』이나 『학기유편』 모두 후대로 오면서 그 내용상에 있어 많은 변화를 거쳤는데, 『학기유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남명집』에 관해서만 개략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남명집』의 변천은 남명학 자체의 성쇠와 직접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다. 선생이 당대에 점유하고 있었던 士林에서의 지위에 비해, 선생의 死後 남명학이 오랜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仁祖反正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光海君 때에 大北政權의 영수였던 정인홍이 중심이 되어 남명선생에 대한 선양사업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선생에 대한 영의정으로의 추증, 선생을 모시고 있는 서원들의 사액, 문집의 증보 · 간행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대북정권이 몰락하고 정인홍이 처형되면서, 이 여파로 남명학파 전체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남명집』에 대한 본격적인 변천도 이 때부터 시작되는데, 『남명집』은 실로 역사상 가장 많은 변천을 거듭하였으니, 金侖壽 씨에 의한 교감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19판본에 이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남명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壬寅年(1602)의 일이고, 이후 重刊과 補遺를 더하면서 인조반정 전까지 4차례의 추가 간행이 있었고, 그 이후에는 몇 가지 이유로 인해 1980년에 이르기까지 14차례의 변천이 있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인조반정으로 처형된 내암의 글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이는 남명학파가 내암을 배척함으로 해서 정치적 소외에서 벗어나려는 자구책이라고도 볼 수 있고, 한편으로는 남명과 퇴계의 양 문에 출입한 제자들에 의해 정인홍이 퇴계를 변척한 글들을 삭제하는 것도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퇴계가 남명을 "老莊을 빌미로 삼았다(老莊爲 )."라고 평한 말에 의해, 남명의 글 속에 가끔씩 나타나는 노장적인 문구가 들어 있는 글을 삭제하고자 한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남명의 학문경향이 "陽明에 약간 관계되었다"는 史官의 평에 의해 陽明學的인 문구를 삭제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네 번째 이유는 남명학파의 자구책적인 흔적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의해 국왕이 賜祭文을 내린 경우, 이를 문집에 실어 선생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다섯 번째 이유는 남명학파의 자체 결속을 위한 방편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인데, 「師友淵源錄」 등의 별집을 포함시키고자 한 것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에 의하면 초간본인 「壬寅本」은 남아 있지 않고, 그 2년 후에 간행한 「甲辰本」이 散秩로 1책이 발견되어 경상대학교 부설 남명학연구소에 있는데, 이것이 현존 最古本이다. 그리고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最古本은 이른바 「己酉本」으로서, 한국문집총간 31 (서울, 민족 문화추진회, 1989)에 수록되어 있다. 그 외에 현재까지 影印되어 간행된 것들을 吳二煥 교수의 조사에 따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別集初刊本」, 한국역대문집총서 205 (서울, 경인문화사, 1988)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山海師友淵源錄』의 초간본을 싣고 있는 것이다. 「釐正合集本」, 이조중기사상총서 (서울, 아세아문화사, 1982)에 수록. 「年譜附重刊本」, 한국역대문집총서 204 (서울, 경인문화사, 1988)에 수록. 「編年附重刊本」, 이조초엽명현집선 (서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59)에 수록. 한편 『남명집』의 번역본으로는 덕천서원과 두류문화연구소에서 같이 1980년에 간행한 李翼成의 譯本이 있는데, 이는 1994년에 김해문화원에서 다시 간행하였다. 그리고 경상대학교 부설 남명학연구소에서 『교감국역 남명집』 (서울, 이론과 실천, 1995)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선생이 직접 쓴 詩文만을 뽑아서 번역한 것이며, 책 뒤편에는 김윤수씨의 교감이 붙어 있어 『남명집』의 변천과정을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남명학연구소에서는 계속적으로 『학기유편』에 대한 교감국역을 비롯하여 門人 및 私淑人들에 의해 쓰여진 남명선생 관계문헌의 번역, 그리고 문인 및 사숙인들의 문집 번역을 년차적으로 주관·추진해 나갈 계획도 아울러 세워 놓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남명선생이 직접 쓴 시문을 모아 교감국역한 『남명집』에 따라 선생의 시문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本集」에 실린 것들을 보면, 詩가 197首 (오언절구 47수, 육언절구 1수, 오언사운 16수, 칠언절구 95수, 칠언사운 24수, 고풍 7수, 칠언장편 4수, 賦 3수), 銘 7편, 書 47편, 記 3편, 跋文 5편, 墓誌 20편, 疏 5편, 論 1편, 雜著 4편 등이 있다. 그리고 補遺에 실린 것을 보면, 詩가 19수 (오언 10수, 칠언 9수), 銘이 2편, 書가 9편, 記가 2편, 墓誌가 3편, 疏가 1편, 雜著 3편 등이 실려 있다.

선생이 직접 쓴 시문은 남명학을 연구함에 있어 일차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므로, 이의 교감번역은 앞으로 남명학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여질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선생의 문장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학문, 사상 등 선생의 참모습을 역사의 편견들로부터 벗어나 살필 수 있을 것이며, 남명학을 오랜 소외와 오해에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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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획시리즈 난은 그동안 경상대학교 오이환 교수에 의해서 수집된 수많은 분량의 남명학관련 고문헌들을 축차적으로 소개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순서는 남명학에 관계되는 중요성, 자료의 희소가치성 등을 고려하되 엄밀하고도 객관적인 기준은 설정하기 어려우므로 편집실에서 적절히 선정해 나갈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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