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2-남명연원을 찾아서

(1) 守愚堂 崔 永 慶

編 輯 室

崔永慶, 公의 號는 守愚堂이며 字는 孝元이고 本貫은 和順이다. 上祖 烏山君 世基가 高麗 平章事였으며 忠節公 永濡는 海州牧使였고, 朝鮮時代에 와서 元之는 戶曹參議였으니 8代祖이다. 曾祖 重洪은 全羅觀察使이며 祖 壎은 司憲府監察이며 考 世俊은 兵曹佐郞이며 平海 孫氏는 文貞公 舜孝의 孫女이며 縣監 濬의 女로 中宗 24年(1529) 乙丑 7월 16일 漢陽 院洞里에서 태어났다.

明宗 22년에 南冥 曺植 선생을 三嘉 雷龍亭에서 찾아뵙고 그의 門下에 들게 된다. 이때 明宗 國喪으로 인하여 竹筍으로 束脩의 禮를 대신하였다. 이에 南冥은 그를 一見하여 高世人物로 허여하였다. 그는 南冥의 敬義를 講討하며 救時와 存養 省察의 爲己之學에 힘을 쏟게 된다. 宣祖 5년 壬申에 南冥의 訃音을 듣고 德山으로 달려가 奔哭하며 心喪 3年을 입었다. 그 뒤 九年 丙子에는 覺齋 河沆, 縣監 河應圖, 州牧 具 과 함께 德山에 南冥祠宇를 창건하여 先師에 대한 慕仰의 精誠을 다하였다.

公은 평생을 小學과 近思錄을 中心으로 삼아 探究하여 爲己의 功力을 쏟았다. 高節한 性品과 自謙의 隱德을 지녔으며 日用行事間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일찌기 큰 눈이 온 뒤에 마당 가운데 叢竹이 모두 쓰러짐을 보고 개탄하여 이르기를, ‘저 의연한 蒼松만이 그 勁節을 고수할 뿐 萎靡하는 대나무는 보잘 것이 없다’하였다. 22년 乙丑에 寒岡 鄭逑의 百梅園을 찾았을 때 仲春의 매화가 무르익어 桃李와 함께 다투어 피는 것을 보고 곧 奴僕을 시켜 도끼로 그 失節한 梅花를 베도록 하였다. 주위의 만류로 그만 두었으나 그의 挺然特立한 節義가 이와 같았다. 이는 가이 당대의 高節淸風으로서 그 풍도가 壁立千 의 氣象을 지녔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公은 宣祖 5년에 그의 行義의 뛰어남에 조정에서 慶州參奉을 제수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六品職을 명하여 守令都事에 補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8년에 司畜으로 被召되어서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累代의 世臣이라 끝내 거절함은 禮가 아니라’ 하고 할 수 없이 詣闕肅拜하였다. 그 해 4월 晋州로 南下하여 道洞의 萬竹山下에 집을 지어 守愚堂이라 扁額하여 隱逸逍遙하였다.

14년 辛巳에 다시 司憲府特平으로 被召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18년 乙酉에는 小學 및 四書의 諺解校正聽郞聽으로 선발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22년 10월 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 온나라가 소요에 휩쓸리게 되자 여러 해 동안 失勢하여 엎드려 있던 西人들이 得勢하여 專權을 장악하고 鄭汝立의 친척, 交誼를 한 사람과 모든 東人을 지목하여 誣陷하였는데 이에 守愚堂이 무고하게 연루되었다. 이른바 吉三峯說을 조작하여 퍼뜨리며 吉三峯은 곧 崔永慶이라는 怪異한 말로써 퍼뜨리니 公은 23년 8월 아우 餘慶과 함께 晋州獄에 잡히게 되었다. 이때 그 원통함을 읍소하는 선비들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王獄으로 이감된 뒤로는 반드시 대궐을 향하였고 언동이 從容靜暇하여 기미가 言色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供招에 다달아서는 추호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선조는 親鞫에서 그 억울함을 헤아리고 9월에는 放免하였다.

이때 問事郞 李白沙 恒福은 公의 늠름한 몸가짐에 경탄하였으며 조정의 백관들은 한결같이 범할 수 없는 그 기상에 놀랐다고 한다.

23年 庚寅 9월 28일 함께 갇혀있던 호남사람 林 이 攝身의 要를 물었을 때 公은 正字를 종신토록 지키도록 가르쳤으며, 하루는 神氣가 편치못하여 士人 朴士吉의 무릎에 눕게 되자 좌우에서 한 말씀 敎訓을 남겨 주기를 청하기에 공은 한 正字를 썼으나 字畵을 다 마치지 못한 채 逝去하였다. 享年은 62세이니 楊州治西 新穴里 木巖 子坐에 장사지냈다.

그 뒤 24年 大司憲 洪汝淳의 論啓로 伸雪되어 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에 追贈되었으며 禮官을 보내 賜祭文하고 27년 甲午에 大司憲 金宇 大司諫 李 , 副提學 金 , 諸公의 三司論啓로 鄭澈의 관작을 삭탈하고 公을 다시 致祭하여 誣構한 鄭澈, 金克寬, 李洽, 柳拱辰을 유배하고 下手人 梁千會,千頃, 姜海를 杖殺하였다.

光海君 3년 辛亥에 梧里 李元翼의 陳啓로 公의 재종제 胤慶의 子 弘緖를 嗣子로 정하였고 4년 壬子에 진사 滄洲 河 외 3백여 人의 陳疏로 德山書院에 配享되었으나 고종 5년 서원이 邦令으로 훼철된 뒤 영남의 유생들이 이를 개탄하여 戊午에 尊德祠와 守正堂을 진주의 서쪽 北平에 신축하였다.

광복전 11년 丙子에 옛 萬竹堂 古址에 道江書院을 짓고 광복 40년 甲子에 淸風祠를 經紀하여 매년 향례를 드리고 있다.

(崔寅찬 의 『守愚堂實記』 解題 中 行狀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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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획시리즈 난에는 남명 연원가 즉 문인, 사숙인 등을 연속적으로 소개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순서는 남명학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되, 한편으로는 원보의 발간시기에 관계되어 중요한 기념행사가 있는 경우에는 그와 관련된 인물을 다루게 될 것이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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