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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63. 박제현(朴齊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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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824회 작성일 03-10-2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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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박제현(朴齊賢, 1521∼1575)의 자는 맹사(孟思)이고 호는 송암(松)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 함안(咸安)에 거주하였다. 박제인의 형이다. 그는 1521년(중종 16년) 10월 10일에 아버지 희삼(希參)의 아들로 함안군(咸安郡) 평광리(平廣里)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문인049.jpg

박제현(朴齊賢, 1521~1575)의 자는 맹사(孟思)이고 호는 송암(松嵒)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 함안(咸安)에 거주하였다. 박제인의 형이다. 그는 1521년(중종 16년) 10월 10일에 아버지 희삼(希參)의 아들로 함안군(咸安郡) 평광리(平廣里)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盎)
기명
(基命)
정화
(精華)

(㽔)
희삼
(希參)
제현
(齊賢)
제인
(齊仁)


그가 남긴 문집은 『송암집(松嵒集)』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박제현은 4세(1524년)에 대인 모암(茅菴)선생이 인‧의‧예‧지‧효‧제‧충‧신 등의 여덟 글자를 가르쳐 주자 금방 풀이하고는 잊지 않았다. 8세(1528년)에는 『소학』을 공부하였고, 9세(1529년)에는 필예(筆藝)가 정묘하였고, 가는 글씨를 잘 썼다. 객이 기이하게 여겨 이르기를, ‘9살난 아동의 필체의 정미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천재’라고 하였다. 박제현은 답하기를 ‘나는 임자(荏子) 일개(一箇)로부터 고인(古人)을 들었고, 능히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네 글자를 썼으며, 마치 내 재주가 아닌 것 같이 부끄럽다’고 하였다.
10세(1530년) 겨울에는 『대학』을 공부하여 문의(文義)의 해석에 밝아 스승을 기다리지 않았다. 부친이 묻기를, “『대학』의 글은 경(敬)을 위주로 하고 ‘경’이란 글자의 시작은 전(傳) 삼장(三章)에 보이는데 이는 무엇인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지어지선(止於至善)입니다. 군자가 명명덕과 신민을 극대화 하는 것입니다. 지어지선이 아니면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요, 지어지선은 강령(綱領)에 긴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소 여기에 보입니다”라고 하였다. 13세(1533년)에는 『중용』을 읽고 항상 이르기를 ‘말은 행동을 되돌아 보고, 행동은 말을 되돌아 본다(言顧行 行顧言)’는 여섯 글자를 종신 용공(用工)의 으뜸으로 삼았다. 14세(1534년) 겨울에는 암송절구(巖松絶句)를 남겼다.
22세(1542년)에는 『주자대전』을 읽고 생각을 정미하게 하여 연구에 열중하고 마음에 얻는 바가 있었다.
37세(1557년)에는 아들 태(珆)에게 명하여 정지린의 문하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41세(1561년) 가을에는 강학지인 송암정사(松嵒精舍)가 낙성되었다.
급문 : 박제현은 35세(1555년) 봄 2월에 모암선생의 명으로 아우 박제인과 함께 덕산으로 가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의문나는 것을 묻고 공부하였다(『松嵒實紀』, 卷1, 「年譜」 35歲條).
과거 및 벼슬 : 박제현은 25세(1545년) 겨울에 옥사가 크게 일어나 선비들이 참벌(斬伐)을 당하자 애통해 하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병들어 선비들이 은둔하니 거업(擧業)을 그만두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27세(1547년)에 대인(부친) 모암선생이 유일로 천거되어 덕릉참봉(德陵參奉)를 제수받아 그 직에 오르자 배행하였고, 28세(1548년)에 모암선생이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으로 이배되자 또한 배행하였다. 29세(1549년) 가을에는 부친의 명으로 향시에 응하였으나 나중에 거업(擧業)을 그만 두었다.
49세(1569년)에는 유일로 천거되어 내금위(內禁衛)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한 공이 천거되어 선공가감(繕工假監)을 제수받은 후 부친의 명으로 몇 달간 머물다가 사직하고 돌아왔다.
강학 및 교유 : 박제현은 36세(1556년) 3월에는 봉성(鳳城)을 지나 정지린을 방문하였다. 39세(1559년)에는 남명선생에게로 가서 급문제현(及門諸賢)과 더불어 도의를 토론하였다.
40세(1560년)에는 부동심(不動心)이라는 세 글자를 벽에 썼다. 이정(李楨)이 이르기를 ‘박모의 일생은 이 세 글자에 있다’고 하였다. 43세(1563년) 4월에는 이제신(陶丘)이 찾아와서 정사(精舍)에 차운(次韻)하였고 8월에 정지린이 찾아와서 기문(記文)을 지었다. 44세(1564년) 겨울에는 정사현, 최영경, 하항(河沆) 등의 삼현(三賢)이 정사시(精舍詩)를 주었다.
54세(1574년)에는 훈설(訓說)을 지어 아들 태(珆)에게 주었고, 이해 7월에 덕산(德山)에서 정구(鄭逑)가 찾아와 그의 덕을 보고 기순(器醇)이 깊음을 칭탄하면서 이르기를 ‘박모는 충후(忠厚)한 유자(儒者)’라고 하였다.
저술 : 박제현은 45세(1565년)에는 병풍에 「주자십훈서(朱子十訓書)」를 쓰고, 항상 눈에 보이는 데 두었다. 46세(1566년) 봄에 『효경』을 찬하여 논하고, 48세(1568년)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짓고 풀이하였다.
향사 : 박제현은 1575년(선조 8년) 8월 25일에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동년 10월에 평광리(平廣里)에 봉정(奉定)하였으며 지견동(知見洞) 선영(親塋) 아래 묻혔다. 후에 평천서원(坪川書院)에 배향하였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朴齊賢, 『松品+山集』 2권 1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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