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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58. 오운(吳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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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203회 작성일 03-10-2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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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오운(吳澐, 1540∼1617)의 자는 대원(大源)이고 호는 죽유(竹)이며, 본관은 고창(高敞)으로 함안(咸安)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0년(중종 35년) 함안 모곡리(茅谷里)에서 아버지 수정(守貞)과 어머니 순흥(順興) 안씨(安氏) 사이에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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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유(竹牖)’를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회암(晦庵)의 “죽유는 남쪽을 향해 열려 있다(「행장」)”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남긴 문집은 『죽유집(竹牖集)』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여 보통 아이들과는 크게 달랐다. 승지공이 특히 아껴서 힘써 가르치고 독려하여 문장과 필획이 심원한 경지에 이르기를 기약하였다. 덕스러운 행실이 더욱 굳세어지고 명성이 날로 널리 퍼지게 되어 동년배 들이 추앙하고 복종하였다.
오운은 6세(1545년)에 조부 오언의(吳彦毅)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8세(1557년)에 퇴계선생의 맏처남 허사렴(許士廉)의 딸인 김해(金海) 허씨(許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인이 아들이 없자 그는 맏사위로서 많은 토지와 집을 상속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의령 가례(嘉禮)에 있으면서 곽재우를 만나게 되었다. 25세(1564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퇴계선생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급문 : 오운은 어려서부터 퇴계와 남명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칭찬을 매우 많이 받았으나. 벼슬길에 오르고 나서는 끝내 옷을 여미고 스승에게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스승을 경모하고 독실하게 믿는 마음은 늙어가면서 더욱 두터워졌다. 그는 항상 책상 위에 문집을 올려 놓고 옷깃을 여미고 받들었는데, 이는 마치 스승과 마주 앉아 기침이라도 하고 계신 듯이 하였다고 한다.
그는 19세(1558년)에 김해 산해정(山海亭)으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었다. 당시 남명선생은 삼가 토동에 거처하면서도 김해의 강학지인 산해정에도 가끔 왕래하곤 하였는데, 오운은 김해 또는 합천의 삼가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수학하였다(『南冥集』, 「編年」 58歲條; 『德川師友淵源錄』, 卷3, 「門人」 吳澐).
과거 및 벼슬 : 오운은 22세(156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27세(1566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유성룡(柳成龍), 김우굉 등도 이 때 함께 급제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유(學諭), 학록(學錄)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할 때까지 10여 년간 계속 성균관에 봉직하였다. 38세(1577년) 봄에는 전적(典籍)에 올랐고, 여름에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戶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을 지냈으며, 겨울에 외직인 명천현감(明川縣監)으로 나아갔다. 39세(1578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의령(宜寧) 가례촌(佳禮村)으로 내려와 백암대(白巖臺)를 짓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고자 하였다.
41세(1580년)에는 성균관 전적(典籍), 직강(直講) 등의 벼슬을 제수받았고, 42세(1581년)에는 정선군수(旌善郡守)로 나아갔으며, 44세(1583년)에는 충주목사 겸 춘추관편수관(忠州牧使兼春秋館編修官)을 제수받았고, 팔봉서원(八峯書院)을 완성시켰다. 45세(1584년) 겨울에는 관직을 그만두고 의령으로 내려왔다. 그가 충주목사로 있을 때 여러 선임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송사를 해결하였으나 이 송사가 감사 일가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감사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는데, 고을 사람들은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49세(1588년) 여름에는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제수받았다.
54세(1593년)에는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영주(榮州) 초곡(草谷)으로 갔다. 당시 영주에는 장인 허사렴의 전장(田莊)이 있었던 곳으로 오운이 재산을 물려 받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60세(1599년)에는 첨지 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 판결사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62세(1601년)에는 대구부사(大丘府使)로 제수되었다(『宣祖實錄』 34년 1월 30일).
강학 및 교유 : 오운은 47세(1586년) 겨울에 정구(鄭逑)가 함안군수로 내려오자 사직단(社稷壇)을 중수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의병활동 : 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오운(53세)은 당시 여러 고을이 적의 침략으로 인해 어지러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을원들은 각자 자기 살길을 찾아 도망가기에 급급하였다. 그야말로 전 국토가 왜적의 손아귀에서 유린되고 있었는데, 이 때 오운은 의령에서 당시 곤란을 겪고 있던 곽재우를 만나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스스로 곽재우 휘하의 수병장이 되었다. 오운은 광주목사를 역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백면서생인 곽재우를 도왔던 것이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오운(58세)은 다시 합천 부근의 왜적을 무찌르고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璘) 제독의 접반사로 활약하였다.
저술 : 오운은 45세(1584년) 4월에 송재(松齋)선생의 『시집(詩集)』을 간행하였다. 48세(1587년)에는 정구(鄭逑)의 주도하에 『함주지(咸州志)』 편찬에 착수하였다.
61세(1600년)에는 『퇴계문집』 간행에 참여하여 「퇴계연보」 교정을 담당하였다. 67세(1606년)에는 동국(東國)의 여러 역사책을 모아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골라내고 7권으로 엮어 『동사찬요(東史纂要)』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이 책은 유성룡(柳成龍)이 읽어 보고 ‘사가(史家)의 종지(宗旨)를 깊이 얻은 것’이라고 크게 찬탄하였다. 또한 선조임금에게 한 질을 봉진(封進)하였으니, 임금은 이를 표준이 되는 유림(儒林)의 가르침이라고 칭송하였다.
74세(1613년)에는 본종(本宗)의 세계(世系)‧행적(行蹟)과 외가선계(外家先系)의 사실을 모아서 『가세지(家世志)』를 편찬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영주에서의 참혹한 상황을 정리한 『용사난리록(龍蛇亂離錄)』을 지었다.
향사 : 오운은 1617년(광해군 9년) 2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한천사(寒泉祠)에 배향되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11년, 16년, 32년, 34년.
『光海君日記』 1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吳 澐, 『竹牖集』.
吳 澐, 『東史簒要』.
『民族文化大百科辭典』 7‧11‧15‧21‧24.
韓永愚, 『朝鮮後期史學史硏究』, 서울: 一志社, 1988.
許捲洙, 「竹牖 吳澐에 대한 小考」,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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