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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3. 정인홍(鄭仁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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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298회 작성일 03-10-2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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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정인홍(鄭仁弘, 1536∼1623)의 자는 덕원(德遠)이고 호는 내암(來庵)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합천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6년(중종 31년)에 아버지 윤(倫)의 아들로 경상우도 합천군의 속현인 야로현 사촌(村: 현 가야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문인002.jpg

그가 남긴 문집은 『내암집(來庵集)』 3권 3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정인홍은 5∼6세(1540년∼1541년)에 이미 작문하는 영특함을 보였고, 가학에 침잠하여 해인사 등 인근의 사찰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안음에 거주하였던 갈천(葛川, 林薰)선생에게 잠시 수학하기도 하였다.

급문 : 정인홍은 15세(1550년)에 남명선생이 고향인 삼가현 토동에 환거하여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鷄伏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자 이에 급문하여 비로소 그 문인이 되었다(『南冥集』, 「編年」 50歲條). 정인홍은 이후 남명선생의 고제로서 최영경, 오건, 김우옹, 곽재우, 정탁, 정구(鄭逑) 등과 함께 남명학파를 대표하게 되었다. 정인홍은 남명선생의 사후 스승의 「행장」을 짓고 『남명집』 간행을 주간하고 스승의 서원을 건립하는 등 명실상부한 남명선생의 고족(高足)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과거 및 벼슬 : 정인홍은 23세(1558년)에 생원시(식년 생원 3등)에 합격하였다.

그는 성리학과 사서오경을 비롯한 『제자백가』 심지어 『병학』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섭렵하였고, 그의 학문이 정박하고 효제에 돈독하며 인격이 빼어나 그 이름이 조정에 알려짐으로써 1573년(선조 6년)에 탁행지사(卓行之士)의 유일(遺逸)로 발탁되었다. 그와 함께 천거된 인물로는 화담(花潭)선생 문인의 이지함(李之), 남명(南冥)선생 문인의 최영경(崔永慶), 퇴계(退溪)선생 문인의 조목(趙穆), 일재(一齋)선생 문인의 김천일(金千鎰) 등이다. 이들은 모두 6품직에 제수되었고 5현사라고 불리었다.

43세(1578년)에는 황간현감이 되어 선치(善治)하였으므로 읍인의 경외한 바가 컸었다. 정인홍은 선조 14년 임금에게 『춘추좌전』을 진강하는 자리에서



오늘날 민생이 곤핍한 것은 대게 공상(供上)이 한정 없기 때문입니다. 그 중 3분의 2 이상이 모리배에게 들어가며 또 수령은 탐학하고 서리는 백성을 베고 짓밟습니다. 사세(斯世)가 이처럼 삼분 오열되어 있으니 백성이 어찌 곤핍하지 않겠습니까? 이 폐단을 통혁(痛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선조실록』, 14년).



라고 상진(上秦)하여 방납의 폐단과 수령의 탐학, 서리의 발호와 같은 임란 직전의 16세기 사회모순을 지적했다. 이것은 그가 목민관으로서 직접 목격한 현실이었으며, 그는 이 폐단을 시정하려고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45세(1580년)에는 선조의 계속된 부름으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출사하였다. 그는 군심(君心)의 잘못됨을 바로 잡으려 노력하였다. 52세(1587년)에는 익산군수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장문의 글을 올려 사류의 폐단, 조정의 무사안일주의, 군왕의 취사불명(取舍不明) 등을 지적하여, 이 폐습을 바로 잡을 것을 촉구하였다.

58세(1593년)에는 체찰사 이원익의 주청으로 영남도 의병대장(嶺南都義兵大將)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장문의 사직봉사에서 전란이 일어나고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원인을 조선사회의 내적 모순의 심화에서 찾고 냉철하게 이를 분석, 전란의 극복과 전후의 재건책에 대한 날카로운 의견을 피력하였다. 59세(1594년)에는 상주목사(尙州牧使),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고 전란의 극복을 위해 여민(餘民)을 수습할 것과 군주(君主)가 정리(政理)를 일신(一新)하여 조정의 붕당(朋黨)을 척결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주장하였다.

67세(1602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 해에 선조는 정인홍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리고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하고 간곡히 불렀다. 그러나 정국은 남인·북인, 대북·소북의 갈등과 대립 속에 어지럽게 전개되고, 그 속에서 그는 뜻을 펴지 못한 채 선조를 알현한 후 사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

73세(1608년)에는 조야에 일대 파문을 던진 소위 「청참유영경소(請斬柳永慶疏)」를 상정(上呈)하였다. 광해조(光海朝) 정국의 실질적 주도자인 이이첨(李爾瞻)과의 관계는 여기서 비롯되었고, 차후 그가 광해정권(光海政權)의 영수 및 고문의 위치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의병활동 : 정인홍은 57세(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5월 10일 동문인 김면(金沔)과 함께 합천의 숭산동에서 회합하여 우도 각지에 산재해 있던 자신의 문인을 주축으로 창의(倡義)하여 대대적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 이 해 창의의 공으로 진주가목(晋州假牧), 제용감정(齊用監正), 성주가목(星州假牧)이 되었다. 11월에 외아들 연(沇)의 병사(病死)를 겪었다.

62세(1597년)에 왜병의 재침이 있자 임진년(1592년)과는 달리 창의가 전무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창의모병(倡義募兵)하였다.

76세(1611년)에는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렸고, 78세(1613년)에는 전년의 임자옥사(壬子獄事)로 유영경이 역률(逆律)로 나중에 시행하고, 정운공신(定運功臣)의 봉작이 있자 일등으로 녹훈되었다. 이 해에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의 우익으로 간주되는 세력에 대한 완전 제거를 주장하였으나, 3차례에 걸쳐 영창대군을 신구하는 소를 올렸다.

82세(1617년)에 폐모의 논의가 크게 일어나자 그는 향리의 본가에 있으면서 백관(百官)의 수의(收議)에 종시 보전하라는 전은(全恩)으로 답하고 이이첨(李爾瞻)과 도당(都堂)에 그 불가함을 강력히 역설하였다.

88세(1623년)에는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서인계(西人系)에 의해 주도된 인조반정으로 그는 광해정권의 모든 책임을 강요당한 채 적신으로 처형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문집과 문인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못하였다.

향후 약 300년간 지속된 서인의 집권으로 영구히 그 명예를 회복할 수 없었으며, 고종 원년 대원군에 의해 사색타파(四色打破)가 표방되자, 그 후손 유학 정기덕을 중심으로 첫 신원의 요구가 있었으나 묵살되고, 융희(隆熙) 2년(1907년) 대한제국 하에서 당쟁으로 희생된 조선조 77인이 대거 신원되는 추세 하에 영의정으로 추복되고 신원되었다. 1911년에 문집이 간행되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6년, 10년, 13년∼14년, 16년, 22년, 25년∼27년, 29년∼33년, 35년∼41년.

『宣祖修正實錄』 2년, 6년, 8년∼9년, 13년∼14년, 16년, 18년, 20년, 22년∼23년, 25년, 31년, 34년∼37년, 39년∼41년.

『光海君日記』 즉위년∼15년.

『仁祖實錄』 1년∼5년, 8년∼9년, 11년, 13년∼14년, 16년, 19년.

『孝宗實錄』 1년, 3년, 6년.

『顯宗實錄』 11년, 13년.

『顯宗改修實錄』 4년, 7년, 11년, 13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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