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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29. 조종도(趙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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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947회 작성일 03-10-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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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조종도(趙宗道, 1537∼1597)의 자는 백유(伯由)이고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으로 시호(諡號)는 충의(忠毅)이다. 그는 1537년(중종 32년) 2월 5일에 함안군 군북면 원북동에서 아버지 참봉공(參奉公) 언(堰)과 어머니 진양(晋陽) 강씨(姜氏; 熙臣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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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문집은 『대소헌집(大笑軒集)』 3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조종도는 9세(1545년)에 은군자인 정두(鄭斗)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그가 글을 처음 배울 때 스승이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문장을 환하게 깨닫고 힘써 공부하므로 정두선생이 크게 기뻐하였다.
16세(1552년) 봄에는 남성(南省)에 갔다가 고숙(姑叔)인 상사(上舍; 進士) 신홍국(申弘國)의 집에 머물러 글을 배웠다. 신흥국이 다른 아이와 같이 대하지 않았고 또한 선생도 예의로써 모셨다. 판부사를 지낸 신잡(申磼) 등도 이 때 같이 배웠으나 그 때 선생의 인품과 재주에는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18세(1554년)에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過人)하니 책을 한 번 대하면 단번에 외우는 특출한 재주가 있었다. 경서(經書), 『사기』, 자집(子集), 예문(禮文) 등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또한 글짓는 재주가 뛰어나서 붓을 잡으면 도도히 흐르는 강하(江河)와 같아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급문 : 조종도는 23세(1559년) 봄에 남명선생을 배알하였다. 그의 빙장(聘丈) 이공(李公; 左參贊 李俊民)은 남명선생의 생질이 되며 이러한 인연으로 문하에 출입하는 일이 잦았고 청문(請問)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南冥集』, 「編年」 59歲條).
과거 및 벼슬 : 조종도는 22세(1558년)에 생원회시(식년 생원 2등)에 합격하였다. 참찬(參贊)이 일찍이 말하기를 ‘동국(東國)의 인물은 다 우리집 소유’라 했으니 그 뜻은 사위들이 뛰어나 모두 관로(管路)에 쟁쟁(錚錚)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이한 기운이 있었으며, 술을 좋아하고 농담과 웃음을 즐겨 자신의 호를 대소헌(大笑軒)이라 하였다. 소소한 절도에 얽매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혹 광인이라고 하나 그는 태연하였다(『東岡集』).
조종도는 40세(1576년)에 선위사(宣慰使)에 수행(隨行)하여 일본 사신 승(僧) 현소(玄蘇)를 송별하였다. 선위사와 현소는 서로 시(詩)로써 화답하는데 일본 사신의 태도가 심히 교만하였으나 선생의 시를 받아서는 벽 위에 걸어놓고 재배하며 읽었다고 한다. 47세(1583년)에는 경기도 양지현감(陽智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그 때 조정에서는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지지하는 사람의 말에 따라 현감으로 나가게 되었다. 48세(1584년)에 어사의 보고에 따라 의복일습(衣服一襲)의 포상을 받았다. 어사의 보고에는 ‘거관(居官)에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어질게 다스렸다’고 한다. 49세(1585년) 가을에는 양지현감을 사직하고 돌아왔고 4월 29일에 “양지현감 조종도는 정사가 평이하였고 백성을 부림에 있어 수월하게 하였으므로 모든 폐추되었던 일들이 점차로 잘 시행되고 있었다(『宣祖實錄』 18년)”고 한다.
51세(1587년) 봄에는 사정에 따라 관직을 사임하고 낙동강으로 배를 타고 돌아왔고, 52세(1588년)에는 금구현(金溝縣)에 있을 때 동헌(東軒)에 높이 앉아 아무 하는 일 없이 보여도 청풍(淸風)이 늠름(凜凜)한 것 같았고, 법령의 까다로움과 부후(賦後)의 가혹한 점은 선생이 사정을 고려하여 고치고 너그럽게 하여 민력(民力)을 배양하였다. 그리고 송사(訟事)에 있어서도 그 사건의 내용을 십분 정찰(偵察)한 연후에 재결(裁決)하였다. 54세(1590년) 4월에는 체포당하여 옥에 갇혔을 때 정여립 사건이 끝나지 않아 조종도 역시 연루자로 오인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마다 떨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자약하였다. 최영경도 같은 혐의를 받고 옥에 갇혀 있었는데, 옥중에 있으면서 옥졸을 자기집 종 부리듯 호통을 하고 조종도는 웃고 농담을 즐기면서 옥중생활에 평상시와 다름없이 당당하였다. 7월에 혐의가 없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최영경은 몸이 말라 옥중에서 숨졌는데, 조종도는 최영경의 말만 들어도 문득 슬퍼하였다고 한다.
60세(1596년) 봄에는 청풍부사(淸風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치 못하다가 가을에 함양군수에 임명되었다.
강학 및 교유 : 조종도는 29세(1565년)에 남명선생을 따라 지곡사(智谷寺)를 유람하였는데 이 때 오건, 도희령, 권문임, 정구(鄭構) 등의 제현들이 모였고 단속사(斷俗寺)로 따라가 경의(敬義)를 강론하였다. 동년 9월에는 오건 등이 운학정(雲鶴亭)으로 찾아왔다(『梅村實紀』).
30세(1566년) 2월에는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에서 회합하였다. 그 때 이정(李楨)은 순천부사로 있으면서 같이 만나 의리를 강론하였고 3월에는 남명선생과 노진(盧禛)을 모시고 안의 갈계리로 갈천(葛川)선생의 형제를 방문하고서 안의(安義) 삼협(三峽)을 구경하였다. 이 때 하항(河沆), 하응도, 이정(李瀞) 등이 함께 하였다(『茅村集』). 이 해에 그는 이정(李楨), 김우옹, 강익, 정유명, 정구(鄭逑), 이광우 등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斷俗寺)에서 산천재(山天齋)로 모였다(『竹閣集』). 38세(1574년)에는 여강서원(廬江書院)을 배알하였는데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권호문, 남치리(南致利) 등과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이학(理學)을 토론하였다.
41세(1577년)에는 안기(安奇)에서 권호문을 방문하였고, 55세(1591년)에는 사림들이 최영경을 남명선생의 서원에 배향하려 하였으나 난리 중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병활동 : 조종도는 56세(1592년) 4월에 왜군이 대거 칩입하게 되자 선생이 서울에서 영남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밤에 몰래 유성룡(柳成龍)을 찾았다. 유성룡은 영상으로 있으면서 대란을 막아내기에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라 서로 마지막인양하고 헤어졌다. 귀로에 직장(直長: 從六品職) 이로를 만나서 같이 영남에 돌아가 의병을 조직하여 왜병을 쳐 부수기로 언약하고 함양에 도착하였다.
57세(1593년)에는 단성현감으로 재직 중에 임진왜란의 격심한 피해로 백성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기근이 극심하였는데, 그는 매일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만 골몰하고 있었다.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61세(1597년)에 그가 함양군수로 재임하고 있었을 봄에 왜적이 다시 움직일 기세가 있었다. 그러자 그는 체찰사 이원익에게 상서하기를,

일조(一朝)에 왜적이 밀어 닥치면 백성은 갈 곳이 없습니다. 군수는 비록 노둔하나 살기를 원하고 주검을 아깝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본군(本郡)의 병민(兵民)을 모두 군수 권한 하에 속하게 하면 요새지를 택하여 한 번 대전하고 죽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체찰사가 이 글을 받아 감읍하여 다 선생의 소원대로 조처하고 요새지를 지리산 근거에 택하려 하니 조가(朝家)에서는 새로 황석산성을 명축(命築)하기로 결정하고 이 체찰사로 하여금 하명케 하였다.
8월 1일에 적이 안음(安陰)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함락시켰다. 현감 곽준(郭逡)과 전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가 전사하였다. 조종도는 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를 지내고 집에 있었는데, 일찍이 ‘나는 녹을 먹은 사람이니, 도망하는 무리와 초야에서 함께 죽을 수는 없다. 죽을 때는 분명하게 죽어야 한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30년)’

라고 하고는 처자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공동산 밖의 생활도 즐거웠지만 장순·허원처럼 성을 지키다 죽는 것도 영광일세’ 라는 시를 짓고는 마침내 곽준과 함께 전사하였다.
62세(1598년) 4월에 임금은 예조좌랑 윤안국(尹安國)을 시켜 치제하였다. 가을 8월에 아들 영한(英漢)이 1년만에 일본으로부터 석방 송환되어서 영혼(英混)과 같이 영구를 모시고 진주 소남(召南) 오리동(梧里洞) 건좌(乾坐)에 묘소를 모셨다.
향사 : 조종도는 1597년(선조 30년)에 세상을 떠난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려를 받았으며 그 자손을 특별히 발탁하도록 하였다. 이는 『삼강행실도』, 『해동명신록』 등에 그 기록이 실려 있다. 훗날 함안의 덕암서원(德巖書院), 안의의 황암서원(黃巖書院),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18년, 21년, 25년, 30년~31년.
『宣祖修正實錄』 30년.
『光海君日記』 1년~2년, 4년, 9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咸安趙氏同知公派世系圖」.
『民族文化大百科辭典』 6·18·20·25.
趙宗道, 『大笑軒逸稿』 3권 1책(『李朝中期思想叢書』),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2.
許捲洙, 「大笑軒 趙宗道 硏究」, 『南冥學硏究』 1,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1.
鄭震英, 「大笑軒 趙宗道와 存齋 郭逡의 義兵活動」, 『南冥學硏究』 2, 慶尙大 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宋準湜, 「大笑軒 趙宗道」, 『南冥院報』 8, 南冥學硏究院, 1997.
韓相奎, 「大笑軒 趙宗道의 선비精神」, 『敎育思想硏究』 3, 敎育思想硏究會,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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