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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2. 최영경(崔永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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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023회 작성일 03-10-2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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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자는 효원(孝元)이고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으로 진주(晋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 24년) 7월 16일에 한양(漢陽)의 원동리(院洞里)에서 아버지 세준(世俊)과 어머니 평해(平海) 손씨(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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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자료는 『수우당실기(守愚堂實紀)』 2권 2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최영경이 33세 되는 해에 이로(李魯)가 아우 보(普)·지(旨)와 함께 그의 문하에서 글을 읽었고(『松巖集』), 58세(1587년)에는 하수일(河受一), 이대기, 김창일, 신가(申) 등이 와서 학문을 배웠다(『雪壑先生文集』; 『濯溪集』). 최영경은 스스로를 삼가고 근면하여 독서를 매우 좋아하였다.

급문 : 최영경은 35세(1564년)에 남명선생의 명성을 듣고 서울로부터 동생 여경과 함께 선생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었다. 36세(1565년)에는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배움을 청하였고(『南冥集』, 「南冥先生編年」, 65歲條), 38세(1567년)에는 이대기와 더불어 덕산의 산천재로 가서 남명선생에게서 배웠다. 이 때 김우옹도 함께 공부하였다(『雪壑先生文集』).

40세(1569년) 봄에는 이정(李瀞)이 남명선생을 찾아 왔는데, 이 때 최영경과 김우옹 등이 더불어 『심경』 공부를 하였다(『茅村集』).

과거 및 벼슬 : 최영경은 약관의 나이에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 회시(會試)에는 실패하였다. 그로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자기수양을 으뜸으로 하는 공부에 정진하게 되었다.

그는 44세(1573년)에 조정에서 학행으로 이른바 것오현사(五賢士)겄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는데, 이는 이조(吏曹)에서 추천하였던 것이다. 화담선생의 제자 중에서는 이지함이, 남명선생의 제자 중에서는 최영경과 정인홍이, 퇴계(退溪)선생의 제자 중에서는 조목(趙穆)이, 일재(一齋)선생의 제자 중에서는 김천일(金千鎰)이 발탁된 것이다. 그 후 52세(1581년)에는 조정에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이제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은 때를 당하여 공론이 행해지지 않고 붕당이 왕성하여 기강이 날로 쇠하니 실로 국가 존망의 갈림길에 처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명덕(明德)으로 밝히고 위엄으로 다스려 붕당을 짓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흉계를 펴지 못하게 하소서 …… .



그러나 이 상소는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이로부터 당쟁은 더욱 거세어져서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급기야 간특배들이 득세하여 어진 선비들이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57세(1585년)에는 『소학』, 『사서』 언해교정청(諺解校正廳)의 낭청(郞廳)으로 소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60세(1588년) 10월에는 정여립(鄭汝立)의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길삼봉(吉三峯)이라는 누명을 쓰고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는 몸이 되자 평소 그를 미워하던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이 위관으로 있으면서 심한 매질을 가하여 끝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다. 죽음에 임박하여 옆에 있던 사람이 남길 말을 청하자 일어나 앉아 바를 정(正)자를 쓰다가 획수를 다하지 못하고 임종하였다. 그는 정여립과 평생에 단 한 차례밖에 만나지 않았다. 48세 때(1577년) 독자였던 홍렴(弘濂)이 요절하여 양주(楊州)에 있는 선친 좌랑공(佐郞公)의 묘 아래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 때에 정여립이 이발(李潑)을 따라 와서 조문하였으나, 그는 정여립의 사람됨을 바로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1594년에 김우옹과 그 친구들의 끈질긴 상소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고, 특별히 선조가 예관을 보내 제문을 내려 충절을 기렸다.

강학 및 교유 : 최영경은 32세(1561년)에 오건, 이조, 김우옹, 하항(河沆), 유종지 등과 함께 서로 강마하였고(『桐谷實紀』), 36세(1565년)에는 덕산의 뇌룡사(雷龍舍)로 남명선생에게 공부하러 온 이광우와 만났고, 겨울에는 정구(鄭構)와 구사재에서 주서(朱書)를 토론하였다(『竹閣集』).

43세(1572년)에는 서울에서 남명선생의 부고를 듣고 바로 달려와 제를 드린 후 3년 동안 심상(心喪)을 하였는데, 당시 이대기가 찾아와서 위로하기도 하였다(『雪壑先生文集』). 47세(1576년)에는 하항(河沆), 하응도, 구변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8월에는 이정(李瀞), 이조, 이로, 이천경, 하응도, 손천우, 이광우, 하항(河沆), 유종지, 성여신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의 건립을 의논하기도 하였다(『浮査集』; 『竹閣集』; 『雪壑先生文集』; 『茅村集』; 『桐谷實紀』). 당시 서원 앞 시냇가에 소나무 100여 그루를 심었는데, 시내 가까이 있는 한 그루는 최영경이 손수 심었으므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수우송(守愚松)이라고 불렀다.

55세(1584년)에는 유성룡(柳成龍)이 영남을 시찰하면서 최영경을 만나러 만죽산으로 찾아오기도 하였고(「西厓年譜」), 58세(1587년)에는 함안군수로 있던 정구(鄭逑)가 방문하여 『주례』를 강론하였다.

최영경이 60세 되던 해(1589년)에 이대기(李大期)가 그를 모시고 하혼의 집으로 가서 김면, 박성, 조응인, 문위, 박정번 등과 담화를 나누기도 하였다(『雪壑先生文集』).

향사 : 최영경은 남명선생을 위해 덕산에 서원을 건립하는 등 스승에 대한 추모사업에 진력하여 훗날 덕천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현재는 진주의 도강서당과 옥종의 수정당에서 향사되고 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6년, 16년, 22년∼41년.
『宣祖修正實錄』 6년∼7년, 14년, 16년, 19년, 23년∼24년, 26년∼27년, 30년, 34년∼35년, 37년, 39년∼40년.
『光海君日記』 즉위년∼4년, 6년∼9년, 11년, 15년.
『仁祖實錄』 1년∼2년, 13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4·6·13·15·16·22.
崔永慶, 『守愚堂實紀』 2권 2책.
崔海甲, 「崔永慶의 生涯와 思想」, 『晋州文化』 11, 晋州敎育大學附設 晋州文化圈硏究所, 1992.
權仁浩, 「守愚堂 崔永慶의 生涯와 學問思想 硏究」, 『南冥學硏究論叢』 2, 南冥學硏究院, 1992.
編輯室, 「守愚堂 崔永慶」, 『南冥院報』 1, 南冥學硏究院, 1996.
崔寅, 「崔守愚堂先生의 靑風高節」, 『嶺右正氣』, 同硯書塾, 1996.
鄭羽洛, 「최영경 삶의 특징과 그 문학의 미적체계」, 『南冥學硏究』 9,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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