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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14. 정탁(鄭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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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018회 작성일 03-10-2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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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정탁(鄭琢, 1526∼1605)의 자는 자정(子精)이고 호는 약포(藥圃)이며 시호(諡號)는 정간(貞簡)다. 본관은 서원(西原)으로 예천(醴泉)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6년(중종 21년) 10월에 예천의 북쪽 금당곡(金堂谷)에서 태어났다. 그는 현감 원로(元老)의 증손으로 이충(以忠)의 둘째 아들인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문인011.jpg

그가 남긴 문집 및 저술은 『약포집(藥圃集)』과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정탁은 9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1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묘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일찍이 고아가 되어 뜻을 잃고 고독했으나 중부(仲父)인 삼가현감 이흥(以興)에게 배웠다. 13세(1538년)에는 백담 구봉령과 더불어 금사사(金沙寺)에서 독서하였고, 병석에서 기삼백기삭치윤법(朞三百氣朔置閏法)을 스스로 고험(考驗)했다고 하니 그 영민조성(穎敏早成)했음을 가히 알 수 있다. 15세에는 이미 경서에 통달했고, 『주자강목(朱子綱目)』 등의 책을 두루 읽었다. 17세(1544년)에는 퇴계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심학지요(心學之要)와 천실지공(踐實之功)에 대해서 공부하였고 28세(1553년)에는 소수서원에서 글을 읽었다.

정탁은 수경학(水經學)을 익히고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수(易數), 병가(兵家)의 학문들을 두루 익혀 막힘이 없었고, 팔진(八陳), 육화(六花) 등의 법도 더욱 깊이 연구하여 쌓아 두었고, 항상 자신이 어려움을 구하고 위기를 지탱하는 일을 담당하였다(「행장」).

일찍이 자제들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겁이목이 총명한 남자 몸은 조물주(洪鈞)가 너에게 부여한 것이니, 구차하게 하지 마라. 대체로 입지(立志)가 고상하지 못하면 마침내 세속에 물든 선비나 뜬구름 같은 인생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라. 세월은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반드시 노력할 뿐겂이라고 하였다.

급문 : 정탁은 천성이 관대하고 형용이 온수(溫粹)하며 충신(忠信) 공서(公恕)하여 남과 나 사이에 간격이 없었다. 어려서는 효순하며 민첩하고 부지런했으며, 자라서는 퇴계(退溪)·남명(南冥) 양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추중(推重)을 받았다(「행장」). 36세(1561년)에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수업하였는데, 돌아갈 적에 선생께서 겁소를 한 마리 주니 타고 가라겂고 하였다. 그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남명선생께서 겁그대는 말이 매우 민첩하니 천천히 멀리 이르는 것만 못하다겂고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남명선생이 소명을 받아 상경했을 때 그는 한강까지 마중을 나와 영접하여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南冥集』, 「編年」 61歲條; 『藥圃集』, 「年譜」 36歲條).

과거 및 벼슬 : 정탁은 27세(1552년) 봄에 성균관(成均館) 생원시(生員試; 식년 생원 3등)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는데, 이미 천인(天人)의 학문을 탐구하려 하니 동렬의 사람들이 남다르게 여겼다. 33세(1558년)에는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탁은 40세(1565년) 가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올랐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탁배(擢拜)되었고, 오건과 만났다(『德溪集』). 41세(1566년) 10월 4일에는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明宗實錄』 21년), 44세(1569년) 5월 21일에는 진주 유생(晉州儒生)의 옥사를 아뢰었다(『宣祖實錄』 2년). 46세(1571년) 4월 11일에 지평에 제수되었고(『宣祖實錄』 4년), 48세(1573년) 8월 26일에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으며(『宣祖實錄』 6년), 56세(1581년) 2월 12일에는 대사헌에 제수되어 4월 1일에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14년).

강학 및 교유 : 정탁은 32세(1557년) 여름에 『계몽』 한 질을 조목(趙穆)에게 주었다. 35세(1560년)에는 성여신에게 『상서』를 주고 이름있는 선생에게 나아가 배울 것을 권유하였다(『浮査集』).

행실 : 정탁은 67세(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수행하여 서쪽으로 피난하였다. 그는 임금을 보필하여 국가의 중흥을 도모하고 화친론(和親論)을 배척하여 물러나 조용히 뜻을 길러 지조를 지켰다.

정구(鄭逑)는 겁정성스럽게 선(善)을 좋아하여 지키고 부지런히 덕(德)에 나아가기를 힘써 벼슬은 삼사(三事)를 지냈으며, 수(壽)는 80여 세에 이르렀으나 학문에 기울이는 정성은 마치 늘 미치지 못한 듯이 하였고, 나와는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겂고 한다.

선조(宣祖)임금도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겁공의 학문은 천인(天人)의 오묘함을 통하였으나 애써 학식을 감추었고, 공의 재주는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구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항상 겸손하였다겂고 한다. 또 이르기를 겁사우(師友) 연원(淵源)의 학문(學問)이 있고, 온순하고 공손한 태도를 지녀, 군신(君臣)이나 나라를 다스리는 재지(才智)를 가지고 중정(中正)의 도를 지켰다겂고 한다.

향사 : 정탁은 80세 때(1605년) 9월 19일에 풍천 고평리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 보이는 서원 부원군 정탁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 정탁(鄭琢)이 졸하였다. 정탁은 인품이 유순하고 온후한 사람인데, 등과했을 당시에는 명망이 없어 오랫동안 교서관(校書館)에 머물러 있었다. 일찍이 향실(香室)에 직숙(直宿)하던 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향(香)을 가져다가 불공을 드리려고 하자, 정탁이 불가한 일이라고 고집하면서 끝내 향을 올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세에 중시되고 이어 현로(顯路)에 통하게 되었으며, 뒤에 호성공(扈聖功)으로 숭품(崇品)에 오르고 얼마 후에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이에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니 고인들의 치사(致仕)하던 기풍이 있었다. 작위를 탐하여 늙어도 물러가지 않는 자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宣祖實錄』 38년).



1605년(선조 38년)에 정탁이 세상을 떠난 후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635년(인조 13년) 8월 1일에 문간(文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 참고자료



『明宗實錄」 21년∼22년.

『宣祖實錄』 2년, 4년, 6년∼8년, 13년∼14년, 16년, 18년, 20년, 22년∼38년.

『宣祖修正實錄』 14년∼15년, 22년, 24년, 28년, 30년, 33년, 36년∼38년.

『光海君日記』 1년∼2년, 5년, 11년.

『仁祖實錄』 13년∼14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7·14·15·16·20.

鄭 琢, 『藥圃集』(『韓國文集叢刊』 39), 民族文化推進會, 1990.

李相弼, 「壬亂時 在朝 南冥 門人의 活動-藥圃∇岡·寒岡을 중심으로-」,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鄭大烈, 「藥圃 鄭琢」, 『南冥院報』 7, 南冥學硏究院,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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