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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문인 4. 권응인(權應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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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454회 작성일 03-11-0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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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권응인(權應仁, 1517~?)의 자는 사원(士元)이며 호는 송계(松溪)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17년(중종 12년)에 감사공(監司公) 수암(水庵) 희맹(希孟)의 여자(餘子)로 태어났고 그가 남긴 문집은 『송계집(松溪集)』 7권 3책이 전한다.
그는 자라서 지행(志行)을 가지고 문장(文章)을 잘하였다.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선생의 문하에 나아가니 모두 그를 인정하였다(『松溪集』, 卷7, 附錄, 都禹璟 撰, 「松溪傳」)고 한다.
그와 남명선생과의 관계는 1570년경 남명선생이 그에게 보낸 편지와 그가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올린 세 편의 시를 통해서 그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1542년(중종 37년)에 둘쩨 형의 천추사행(千秋使行)을 따라 명(明)나라에 사신가서 중국을 관광하였다.
권응인은 아버지 때부터 잘 지내던 정의(情誼)로써 호음(湖陰)을 배알하자 호음이 그의 준재(俊才)를 아껴 학사대부(學士大夫)들 사이에서 계속 추천하였다. 정유길(鄭惟吉), 홍섬(洪暹)과 같은 여러 공들은 한 시대의 문형(文衡)을 잡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모두 송계를 추증하였다(『松溪集』, 卷7, 附錄, 都禹璟 撰, 「松溪傳」)고 한다.
또한 권응인은 1562년(명종 17년)에 일본 사신을 영접하는 일에도 관여하여 선위사(宣慰使) 이령(李翎)의 일원으로 왜사(倭使)의 수창(酬唱)에 대비한 일이 있고, 그 뒤 1580년(선조 13년)에 왜사(倭使) 현소(玄蘇)가 왔을 때 선위사 김우옹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당시 권응인과 교유한 이들로는 심수경(沈守慶), 이홍남(李洪男), 송인(宋寅), 황준량(黃俊良), 양응정(梁應鼎), 이후백(李後白), 김극일(金克一), 김우굉(金宇宏), 이준민(李俊民), 기대승(奇大升), 정지연(鄭芝衍), 신응시(辛應時), 이이(李珥), 이제신(淸江, 李濟臣), 이해수(李海壽), 김우옹(金宇顒), 유성룡(柳成龍), 정구(鄭逑), 조원(趙瑗), 양대박(梁大樸), 임제(林悌), 허봉(許篈), 이윤우(李潤雨) 등의 비슷한 연배와 후배에 속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묘소는 문방리(文方里) 오도(吾道) 마을에 있다. 도우경(都禹璟)이 향인과 더불어 송계서당(松溪書堂)을 복원하고, 묘(墓)에 제사지냈으며, 자신이 주도하여 1791년(정조 15년)에 도암서원(道巖書院)을 건립하고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 참고자료

『星州志』.
『묵계일기』.
權應仁, 『松溪實紀』.
孫在壽, 「松溪 權應仁의 生涯와 批評意識」, 安東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95.
文靘釪, 「松溪 權應仁의 漢詩 硏究」, 慶尙大學校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7.
姜求律, 「松溪 權應仁의 삶과 詩世界의 한 局面」, 『東方漢文學』17, 東方漢文學會,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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