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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114. 허성(許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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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760회 작성일 03-10-2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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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허성(許筬, 1548∼1612)의 자는 공언(功彦)이고 호는 악록(岳麓)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경성(京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8년(명종 3년)에 아버지 엽(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봉(), 균(筠)의 형이자 난설헌(蘭雪軒)의 오빠이기도 하다.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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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문집은 『악록집(岳麓集)』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허성은 젊어서 유희춘(柳希春)을 사사하였고, 가정의 교육에서 얻은 것이 가장 많았다.
천성이 충후(忠厚)하고 직방(直方)하며, 행동은 반드시 예법에 맞게 하였다. 학문은 육경(六經)에 근본하였고 일을 당하여 옳다고 생각하면 비록 천만인(千萬人)과 다투더라도 동요하지 않았다.
과거 및 벼슬 : 허성은 21세(1568년)에 증광 생원 1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36세(1583년)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대사성, 대사헌, 예조와 병조판서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과 같이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 때 황윤길이 일본의 침략 의도를 지적했으나 부사인 김성일이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하자 같은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김성일의 의견에 반대, 풍신수길의 침략의도를 언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강직한 성품을 반영하는 일로써 반드시 당파에 충직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의 행동거지는 예에 기반하여 학문은 반드시 육경(六經)에 기초하였으니, 학문과 도덕으로 사림의 명망을 얻은 성리학자였으며, 선조 고명(顧命) 7신(臣) 중의 하나였다. 당시 이름난 문장가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42세(1589년) 11월 18일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었고(『宣祖實錄』 22년), 43세(1590년) 3월 6일에는 일본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이 출발하였다(『宣祖實錄』 23년). 45세(1592년) 8월 28일에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제수되었고, 10월 13일에 겸 관상감 교수(兼觀象監敎授)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25년). 46세(1593년) 3월 26일에는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고, 3월 27일에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었으며, 7월 4일에 사헌부 집의 겸 세자 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고 9월 7일에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다(『宣祖實錄』 26년).
47세(1594년) 2월 16일에는 진주사 허성이 왜적의 상황 등을 서술한 자문을 가지고 갔다 3월 2일에 비변사에서 허성을 접반 부사에 임명할 것을 청하는 글에, “총독(摠督) 고양겸(顧養謙)이 이미 봉황성(鳳凰城)에 도착하였으니 접반사(接伴使)는 미리 강상(江上)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분부가 있으면 달려가 듣게 함이 옳습니다. 더구나 지금 자문(咨文) 가운데 충성스럽고 용맹한 배신(陪臣) 두 사람을 먼저 오게 하라는 말이 있으니 더욱 때를 맞추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심희수(沈喜壽)를 이미 접반사로 삼았거니와 허성(許筬)이 마침 평안도에 있으니 허성을 접반부사(接伴副使)로 삼아 밤낮을 가리지 말고 달려가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4월 10일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27년).
50세(1597년) 1월 5일에는 동부승지에 제수되었고 1월 22일에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며 4월 17일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30년). 57세(1604년) 4월 2일에는 예조참판이 되었고 7월 27일에 예조판서가 되었다(『宣祖實錄』 37년). 58세(1605년) 1월 4일에는 병조판서가 되었다(『宣祖實錄』 38년).
학문 : 허성은 60세(1607년)에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게 되어 세인들이 고명칠신(顧命七臣)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는 선조대에 학문과 덕망으로 사림의 촉망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65세(1612년) 8월 9일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지중추부사 허성의 졸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허성은 훈명(勳名)도 받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다. 관에서 갖추어 줄 장사 물품을 법전에 의거해서 시행하라’고 하였다. 허성은 허엽(許曄)의 아들이다. 그의 배다른 동생인 허봉(許篈)‧허균(許筠)과 더불어 모두 이름이 났었는데, 허성은 이학(理學)으로 자칭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고집스럽고 꽉 막혔으며, 당론을 좋아하여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공격하였는데, 늙어서는 더욱 심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임해군을 고발하여 원훈이 되어 다시 임금의 은총을 받다가 얼마 뒤에 죽었다. 반정 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光海君日記』 4년).

1612년(광해군 4년) 8월 6일 허성은 65세의 일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 후 찬성에 추증되었고, 광주(廣州) 토당리(土堂理) 진좌술향(辰坐戌向)의 등성에 장사지냈다.

□ 참고자료

『明宗實錄』 22년.
『宣祖實錄』 22년~27년, 29년~40년.
『宣祖修正實錄』 23년~25년, 27년, 31년, 39년.
『光海君日記』 즉위년~2년, 4년~5년, 7년~10년.
『仁祖實錄』 1년, 17년.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4‧15‧18‧24.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許 筬, 『嶽麓集』 2권(『韓國文集叢刊』 57), 民族文化推進會,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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