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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1. 오건(吳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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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655회 작성일 03-10-2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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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오건(吳健, 1521~1574)의 자(字)는 자강(子强)이고 호(號)는 덕계(德溪)이며, 본관(本貫)은 함양(咸陽)으로 산청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1년(중종 16년) 4월 6일 경상남도 산음현(山陰縣) 석답리(石沓里)에서 세기(世紀)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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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문집 및 자료는 『덕계집(德溪集)』 8권과 『역년일기(歷年日記)』가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오건은 9세 때(1529년)부터 『대학』, 『논어』 등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책을 살 돈이 없었으므로 집에 있는 책과 아버지의 훈도를 생각하면서 날로 배움을 더해 갔다. 그리하여 백절불굴의 의지와 인내심을 스승으로 삼아 『중용』을 천여 번 거듭 읽어 각 구절과 장의 음과 훈의 뜻을 깨우쳤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대학』과 『논어』, 『맹자』, 경(經)·사(史)·자(子) 등을 두루 공부하였다. 이러한 독서법은 다른 책에도 적용되었으며, 『주역(周易)』을 외숙으로부터 배우기도 하였다. 그가 경서를 읽은 횟수는 『중용』이 부지기수였고, 『대학』은 약 천여 회, 모든 경사는 모두 4~500회 이상 달하였다.
39세(1559년)에는 성균관 학유라는 교수직으로 경상좌도 성주목 훈도로 재직하면서부터 후생교육을 임무로 삼고 유생을 4등급으로 분반하여 가르쳤다.
오건은 퇴계선생의 문하에도 나아가 43세에는 주자학을 배우고, 『심경』과 『근사록』을 질문하자 퇴계선생은 『중용』에 있어서는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퇴계선생의 사후 51세 때에는 사제문(賜祭文)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44세(1564년)에는 여러 유생을 모아 『중용장구』를 가르쳤는데, 이 때 대사성이던 허엽(許曄)이 『대학』을 강론하고 말하기를, ‘우리 무리 가운데에 더불어 비할 이가 없다’고 하였다.
54세(1574년) 여름에 문위(文緯, 21세)가 산청으로 찾아오자 『주역』을 가르쳤다.
급문 : 오건은 31세(1551년)에 처음으로 뇌룡정(雷龍亭)으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었는데, 남명선생이 그의 독실함을 사랑하여 마침내 학문에 나아가는 문정을 열어 보였고, 『소학』과 『대학』 및 『근사록』 등을 배우도록 권하였다(『宣祖修正實錄』, 권6, 5년 2월 1일 정사; 『南冥先生年譜』; 『德溪集』). 이 때 이광우(李光友)도 와서 성리(性理)와 경의(敬義) 등을 강론하였다(『竹閣集』).
과거 및 벼슬 : 오건은 1552년(명종 7년) 진사회시(進士會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38세(1558년)의 대과(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 13년에 걸친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44세(1564년) 5월에 성균관 학유를 제수받아 상경하였고 다음 해에 학록관(學錄管) 중학(中學)을 제수받았다. 47세(1567년) 정월에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기사관(記事官)을 거쳐 2월에는 성균관 전적이 되었고, 3월에는 사간원 정언, 6월에는 예조 정랑, 병조 좌랑이 되었다. 48세(1568년) 4월과 7월에는 사간원 정언을 제수받고 「청진학납간소(請進學納諫疏)」를 올렸으며, 8월에는 이조 좌랑과 정언을 제수받고 「청물순예접견이황계(請勿循例接見李滉啓)」, 「논국혼비례소(論國昏非禮疏)」, 「청국혼상검계(請國昏尙儉啓)」 등을 올렸다. 11월에는 「사간원청제가소(司諫院請齊家疏)」, 「청정심납간소(請正心納諫疏)」, 「청죄신사정불효계칠(請罪申士禎不孝啓七)」, 「청출석상궁계삼(請黜石尙宮啓三)」 등을 올렸다. 49세(1569년)에는 공조 좌랑, 예조 좌랑, 정언, 전적, 사간원 헌납, 성균관 직강,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다.
50세(1570) 8월에는 어사로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을 겸하여 호남을 두루 살피고 「어사겸재상경차관시계이(御史兼災傷敬差官時啓二)」와 「논포조포졸폐막계(論逋祖逋卒獘瘼啓)」를 올렸다. 특히 이 때 포조 포졸의 폐단을 고친 일은 민생에 깊이 관련된 사안으로, 남명선생으로부터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51세 4월에는 홍문관 부교리를 배하고 「청거경궁리차(請居敬窮理箚)」를 올렸고 6월에는 예조 정랑, 이조 정랑을 제수받았다. 53세(1573년) 11월에는 성은에 보답코자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을 제수받고 상경하였다가 중도에 신병(身病)으로 사양하고 돌아와 서계(西溪)에서 지냈다. 그 후 54세(1574년) 3월에는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
강학 및 교유: 오건은 19세(1539년)에 양희(梁喜)와 만나 경서를 강론하였다.
33세(1553년)에는 노진(盧禛), 강익(姜翼) 등과 더불어 지리산을 유람하였고(『梅村實紀』; 『介庵集』), 36세(1556년)에는 성균관에 나아가 강학하였다. 38세(1558년)에는 노진, 이후백(李後白), 강익 등과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였다(『灆溪集』).
41세(1561년)에는 최영경(崔永慶), 이조(李晁), 김우옹(金宇顒), 하항(河沆), 유종지(柳宗智) 등과 서로 오가며 강마하였다. 43세(1563년) 봄에는 이조(李晁)가 산음(山陰)의 자연동(紫烟洞)으로 찾아왔다. 여러 날을 동계(桐溪)와 더불어 선비와 군자의 출처에 대하여 논하였으며, 이조와는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오갔다(『桐谷實紀』). 44세 7월에는 남명선생을 모시고, 노진, 김우옹 등의 여러 동학과 덕산사(德山寺), 지곡사(智谷寺), 환아정(換鵝亭), 남계서원 등을 두루 다니며 자연을 음미하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45세(1565년)에는 현관(縣舘)에서 노진을 만났고 조종도와 노흠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11월에는 노진과 더불어 함양의 남계서원에 모였는데 조식(曺湜)이 찾아왔다. 이 해에는 남명선생을 따라 지곡사를 유람하게 되었는데, 당시 도희령(都希齡), 권문임(權文任), 정구(鄭構) 등도 모였고 단속사(斷俗寺)로 따라가 경의(敬義)를 강론하였다. 이 후 서원에 머물면서 노진, 강익 등과 「연평문답(延平問答)」을 강론하고, 12월에 동산사(東山寺)의 효렴재(孝廉齋)에서 주서(朱書)를 강론하였다. 46세(1566년) 봄에는 남명선생을 모시고 노진, 강익, 김우옹 등과 더불어 산청의 지곡사(智谷寺)에 모여 여러 날 동안 자연을 완상하면서 다음의 시를 읊었다.

초 십일에 선생께서 지곡사에 이르니 오건이 노공[盧禛]을 맞이하여 와서 뵈었다. 이튿날 강익, 김우옹, 정복현, 도희령, 정유명, 임희무 등이 잇달아 도착하였다. 멀고 가까이 있는 선비들이 이러한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 여러 날 동안 학문을 강론하였다(『灆溪集』).

52세 되던 해에 남명선생이 돌아가시니, 장례 때에 문인의 첫 번째 자리에서 예를 치루었다.
오건은 남명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문익성, 하항(河沆) 등과 각별하게 지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고(「玉洞先生年譜」), 그와 교유한 이들은 양희(梁喜), 노진, 강익, 정복현, 도희령, 정유명, 임희무, 노흠, 이로 등을 비롯한 남명선생의 문인들 대부분이 포함되며, 특히 김우옹, 정구(鄭逑) 등은 그가 성주 훈도로 재직할 때 직접 가르치기도 한 인물이다.
행실 및 평가 : 오건은 효행에도 뛰어나 11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14세에 조모의 상을, 그리고 29세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특히 어머니가 병들자 날마다 어머니의 인분을 맛보아 건강을 점검하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묘살이 하면서 한 번도 집에 오지 않고 죽을 먹으면서 지냈고,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다시 심상(心喪)을 행하여 아침저녁으로 전을 드리고 하루에 세 차례씩 울었다. 이러한 그의 효행을 가상하게 여겨 명종(明宗)은 복호를 명하였다(『明宗實錄』 4년 4월 30일).
또 그의 행실에 대해서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조정랑 오건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오건은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조식을 따라 배우다가 늦게 과거로 발신(發身)하였는데, 문벌이 낮아 벼슬이 높이 오르지 못하였다. 많은 명사들이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 사관(史官)으로 천거하였다. 사관은 으레히 시재(試才)를 거친 자가 하였는데 오건은 취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오건이 말하기를, ‘내가 괴롭게 스스로 천고 시비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 뭐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6품으로 오른 뒤에 청요직을 지냈고 전조(銓曹)의 낭관이 되어서는 공도(公道)를 넓히기에 노력하였다. 사람됨이 순실(淳實)하고 과감하여 어떤 일을 당하면 곧장 앞으로 밀고 나가고 흔들리는 일이 없었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 노진(盧禛)은 오건과 친분이 있었는데, 나무라기를, ‘그대가 초야에서 출세하여 현달하였으니 그대에게는 과분한 일이다. 따라서 마땅히 뒤로 빠지고 조심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섣불리 자신의 소견을 고집하여 많은 사람의 노여움을 자초하는가’라고 하였으나, 오건은 그 자세를 마냥 고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노여움은 더 심해갔다. 게다가 주상의 뜻이 사류(士類)를 싫어하고 유속(流俗)의 형세는 더욱 강해지므로, 오건은 일을 시행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宣祖修正實錄』 5년 2월 1일).

또 전 홍문관 전한 오건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전 홍문관 전한 오건이 졸 하였다. 오건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단성(端誠)하고 견고하였는데, 11세에 부친의 상을 당했을 때 이미 효성으로 소문이 났고 장성하여 모친의 상을 만나서는 더욱 예문(禮文)에 독실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학문에 뜻이 있어도 선생을 모시고 배우지 못했는데, 집안에 있는 『중용』 1권을 수백 번 읽어 음훈(音訓)이 익숙해 진 뒤에 비로소 깊이 사색하며 전심으로 정밀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오래되어 의심나고 모르는 것이 차츰 없어진 다음에야 『대학』·『논어』·『맹자』로 옮겨갔는데, 그 때는 공부하기가 매우 쉬웠다. 이에 선생(先生) 장자(長者)를 찾아가 강론하였는데, 요체가 있었으므로 이황(李滉) 이하 숙유들이 모두 그가 정밀하고 깊어 미칠 수 없다고 칭찬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저명해져 현직에 등용되기에 이르렀다. 명묘(明廟)가 승하하였을 때는 예복(禮服)으로 방상 3년(方喪三年)을 하고 소식(素食)하였으니, 그 독실한 행실이 이와 같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사림이 많이 아깝게 여겼으며 반드시 다시 기용하려고 잇따라 시종직(侍從職)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시골에서 지낸 지 3년 만에 졸하니 나이는 54세였으며, 학도들은 덕계선생(德溪先生)이라 불렀다. 그 뒤에 향인(鄕人)이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宣祖修正實錄』 7년 7월 1일).

향사 : 오건은 1574년 7월 24일에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사후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리 덕우촌에 있는 서계서원(西溪書院)은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 참고자료

『明宗實錄』 4년, 22년.
『宣祖實錄』 즉위년~2년, 7년.
『宣祖修正實錄』 1년~2년, 4년~5년, 7년, 19년.
『光海君日記』 5년, 12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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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 健, 『德溪集』 8권(李朝中期思想叢書),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2.
吳 健, 『德溪集』 8권(韓國文集叢刊), 民族文化推進會, 1990.
吳 健, 『歷年日記』 1책.
曺 植, 『南冥集』 7권 4책.
姜 翼, 『介庵集』 3권 1책.
李光友, 『竹閣集』 2권 1책.
文益成, 『玉洞集』 3권(이조중기사상총서), 서울: 아세아문화사, 1982.
鄭復顯, 『梅村實紀』 2권 1책.
林希茂, 『灆溪集』 2권 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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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相奎, 「德溪 吳健의 선비 精神」, 『南冥學硏究論叢』 2, 南冥學硏究院,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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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珪煥, 「德溪 吳健先生의 生涯와 學問의 性格」, 西溪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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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弼, 「德溪 吳健의 歷年日記」, 『南冥學釜山硏究院報』 5, 釜山: 南冥學釜山 硏究院, 1997.
李商元, 「南冥學派에 있어 吳德溪의 位相」, 『南冥學硏究論叢』 7, 晋州: 南冥學硏究院出版部,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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