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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기획특집 - 남명선생에 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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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179회 작성일 04-01-1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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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3] 영남일보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3] 남명 조식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100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됩니다.…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孤嗣)이실 뿐이니, 천가지 백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남명집, 을묘사직소) 16세기를 대표하는 선비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은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한 후에 올린 사직 상소문에서 위와 같이 당시 정치·사회의 위기 의식을 날 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하였다. 특히 문정왕후를 과부로 표현하고, 명종을 고사(孤嗣)로 표현한 부분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직선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말 한 마디로 목숨을 날릴 수 있는 절대 군주 앞에서 일개 처사(處士)에 불과했지만 남명은 이처럼 당당하게 발언하는 선비였다.

남명이 살아간 시대는 사화(士禍)의 시기였다. 50년간 지속된 사화로 말미암아 지방에서 학문적,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 정계 진출을 모색하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좌절을 맛봐야 했다.

을사사화 이후 사화의 끝이 보이는 듯 했으나, 명종의 즉위와 문정왕후- 윤원형으로 이어지는 외척정치의 횡행은 국가의 기강 문란과 왕실 친인척을 비롯한 권세가들의 정치 독점을 강화시켰다. 남명은 이런 현실에서 선비가 서야 할 길은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으로 여겼다. 국왕에게 불경한 표현이 될지언정 현실의 모습을 바로 지적해 주는 것이 선비의 몫이라 판단했다. 당시 이 상소문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는 이유로 남명을 처벌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상당수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남명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 만하다’거나, ‘남명에게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는 논리로 남명을 적극 변호함으로써 파문을 가라 앉힐 수 있었다. 왕실의 비행을 적극적으로 지적한 재야 선비의 발언을 존중한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오늘날도 주목할 만하다. 남명은 1501년 외가인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났다. 당대에는 물론 조선 후기까지 퇴계와 함께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인식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북인의 숙청이 이루어졌고, 북인의 핵심인 정인홍이 남명의 수제자였던 까닭에 남명에 대한 폄하도 뒤따르게 되었다. 조선 후기 내내 남명의 존재가 역사 속에서 잊힌 것이
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남명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이루어지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남명학연구원 등 남명과 남명학파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어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남명의 학문과 현실관이 당대 및 현대에까지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남명은 무엇보다 학문에 있어서 수양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경(敬)과 의(義)는 바로 남명 사상의 핵심이다. 남명은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신념화하였다. 남명의 이러한 모습은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항상 깨어있음)라는 방울을, 의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닌 모습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고 새겨 놓았다. ‘방울과 칼을 찬 학자’ 언뜻 연상되기 힘든 선비의 캐릭터지만, 남명은 이러한 모습을 실천해 나갔다.

조정에 문제점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통해 과감하게 지적하였고,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후학들에게는 강경한 대왜관(對倭觀)을 심어 주었다.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 등 남명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도 그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8세기의 실학자 이익은 남명과 퇴계에 대해, ‘상도(上道)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下道)는 의(義)를 주로 하며, 퇴계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며 함축적으로 대비시켰다. 퇴계의 인(仁)이 문치를 말하는 선비에 어울린다면, 남명의 의(義)는 상벌에 엄격한 무인에 어울리며, 그가 차고 다녔던 칼의 이미지와도 맥을 같이한다. 남명의 칼은 안으로는 자신에 대한 수양과 극기로, 밖으로는 외적에 대한 대처와 조정의 관료들에게 향해져 있었다. 칼로 상징되는 남명의 이미지는 과감하게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해 가는 실천적인 선비 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남명 학문의 핵심은 학자의 철저한 자기 관리와 적극적인 현실 대응으로 집약된다. 중앙 정치가 정쟁과 권력 독점으로 인해 새로운 정치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없을 때 남명은 그 대안으로 보다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비판세력의 현실 참여를 적극 주장했다.

엄격한 자기 관리를 통해 비판자의 안목을 키우고 원칙과 양심에 비추어 옳은 것이라면 그 대상이 국왕이라도 결단코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죽음에 이르면서도 현실비판자로 살아간 처사(處士)로 불려지기를 원했던 것도 이러한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간 것이었다. 500여년이 지난 요즘, 언론사와 방송사간의 싸움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국가와 국민의 이익보다는 방송사와 언론사 자신의 입장만을 쏟아 붓는 프로그램과 기사만 상당수를 차지할 뿐 냉철하게 현재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내용은 보기가 힘들다. 대개는 사후약방문식으로 이미 터져 버린 사건에 대해 해설하는 방식이다.

시대를 고민하고 국정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인, 학자, 언론인을 찾기도 그리 쉽지 않다. 남명처럼 서릿발같은 비판과 직언을 쏟아내는 지식인, 그리고 그것을 수용해 주었던 조정의 분위기, 이것이 16세기 조선사회를 이끌 수 있었던 하나의 힘은 아니었을까? 남명의 칼을 이 시대에 다시 빌려오고 싶다.

*左퇴계 右남명


“평생 마음으로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 (남명집, 퇴계에게 드리는 편지, 1564년) 위 편지는 서두에서 남명이 퇴계와 한번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성리학 이론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퇴계에게 충고의 형태로 쓴 편지이다. 남명은 퇴계와 동년인 1501년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식되었다. 퇴계의 근거지 안동·예안은 경상좌도의 중심지, 남명의 근거지 합천·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지,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계(左退溪) 우남명(右南冥)’으로 나뉜 것이다. 퇴계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기질의 소유자로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 발전시켜 간 모범생 유학자라면 남명은 독특한 캐릭터의 유학자였다. 경과 의의 상징으로 성성자라는 방울을 지니고 칼을 찬 모습하며, 과격하고 직선적인 언어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강한 개성은 그를 특징짓는다. 남명은 퇴계의 이론 중심적인 성리학을 비판하였고, 퇴계는 남명의 학문에 대해 ‘신기한 것을 숭상한다’거나 ‘노장적 경향이 있다’고 하여 은근히 신경을 자극하였다. 두 사람은 현실 인식에도 차이를 보였다. 명종대 후반 이후 퇴계는 출사하여 경륜을 펴는 것도 학자의 본분을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여겼지만 남명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모순이 절정에 이른 ‘구급(救急)’의 시기로 인식하고 끝까지 재야의 비판자, 처사로 남을 것을 다짐했다.

왜적에 대한 입장에서도 둘의 눈은 달랐다. 퇴계가 회유책을 견지한 데 비해 남명은 강력한 토벌책을 주장했다. 퇴계의 성리학이 일본에 큰 영향을 주고 남명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되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신병주<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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